정전회담, 매우 지루하고도 잔인하게 계속되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48) #13. 거제포로수용소 ③

등록 2013.09.20 11:09수정 2013.09.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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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당시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가건물 천장 아래에는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을 본떠 붙였다.

당시 판문점 정전회담장으로, 가건물 천장 아래에는 피카소의 비둘기 그림을 본떠 붙였다. ⓒ 눈빛출판사


교착상태

1951년 3월 이후 전선은 38선에서 거의 교착상태였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38선을 사이 두고 지루한 공방전을 거듭 펼쳤지만 개전 초기와 같은 전선의 급격한 변동은 없었다. 서로 상대의 샅바를 거머쥔 채 상대방 허점만 노리는 씨름꾼의 형세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일 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 모두 그제야 비로소 단시일 내 상대편을 군사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런데다가 장기간 전선은 북위 38도선 일대에서 교착되자, 국제 외교가에서는 정전 논의가 슬그머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신호탄을 쏜 첫 주인공은 미소간 사전 비밀 접촉 끝에 조율한 각본 그대로 주유엔 소련대사 말리크였다. 그는 유엔방송을 통해 '평화의 가치'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 인민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종용하고, 교전국 간의 정전협상 토의가 시작되기를 희망한다."

이 한 마디는 전쟁 당사자, 특히 미국에게는 불감청고소원으로, 대단히 반가운 말이었다. 세계 최강을 자부하던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체면상 먼저 '정전'이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대외적으로 소련 측에서 이를 먼저 제의하자 미국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미국은 본심을 숨긴 채 몽니를 부리다가 겉으로는 말리크 소련대사의 체면을 살려주는 척, 의뭉스럽게 슬그머니 정전협상 테이블로 나갔다.

국제 여론 역시 대체로 조속한 종전 방향으로 흘러갔다. 말리크 소련대사의 연설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최초의 정전회담이 열렸다. 이에 한국 이승만 대통령은 완강하게 이 정전회담을 반대했다. 전국에서는 연일 휴전반대 관제 데모가 일어났다. '통일없는 휴전은 있을 수 없다'고 여학생들까지 나섰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정전회담이 열리자 곧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은 본회담 시작 17일 만에 5개 항의 의제와 의사일정에 전격 합의했다.


a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부산, 1953. 6. 11.).

학생들이 정전회담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부산, 1953. 6. 11.). ⓒ NARA, 눈빛출판사


팽팽한 줄다리기

한 서방기자는 한국전쟁 정전회담 취재차 3주일간의 출장명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 그만큼 서방 대부분 나라는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매우 쉽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막상 정전회담에 참석한 양측은 서로 전장이 아닌, 정전협상 테이블에서만은 이기고 싶었다.


특히 세계 최강을 자부했던 미국은 그들이 형편없이 깔보던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협상테이블에 마주 앉은 그 자체부터 치욕으로 느꼈다. 그래서 미국은 그들의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정전회담에서 상대방에게 줄곧 무리한 요구를 했다.

한편 중국도 이참에 그동안 국제사회에 '종이호랑이'로 실추된 그들의 자존심을 되살리고자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즐기면서 일축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정전회담장에서 미국과 대등하게 팽팽한 줄다리기하는 모습을 서방기자에게 보여주며, 이 기회에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를 마냥 즐겼다. 세월은 자기들 편이라는 만만디 자세로.

그러자 정전회담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아니라, 교전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한 또 하나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정전회담은 그 어느 전쟁의 강화회담보다 매우 지루하고도 잔인하게, 그리고 장기간 계속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정전협상 5개 항 가운데 가장 오랜 시일을 끈 난제는 제4의제인 전쟁포로 처리문제였다.

정전회담 제1의제는 의제 선택과 의사일정 문제로, 협상 13일 만에 쉽게 타결했다. 제2의제 군사분계선 문제는 4개월간 줄다리기 끝에 쌍방은 지상의 현 전투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이 각 2킬로미터 씩 후퇴하여 비무장지대를 설치키로 합의했다. 제3의제인 정전 감시조항과 실시기구의 구성, 권한 및 직책 문제도 협상 6개월여 만에 타결을 보았고, 제5의제인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방안도 협상 21일 만에 타결되었다.

사실 제4의제인 포로 송환문제는 제네바 협정에 따르면 가장 쉽게 타결될 문제였다. 제네바 협정 제118조에는 "적극적인 적대 행위가 끝난 후에 전쟁포로들은 지체 없이 석방, 송환되어야 한다"고, 포로의 자동송환 원칙을 밝히고 있었다.

a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실무자가 비무장지대 분계선을 긋고 있다.

공산군 측과 유엔군 측 실무자가 비무장지대 분계선을 긋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포로교환 난제

그런데 유엔군 측은 이 의제에 대해 느닷없이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포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 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나섰다. 공산 측은 이는 제네바 협정 위반으로 포로들의 전원 송환을 강력히 주장하자, 정전협상 의제 가운데 이 문제는 최대 암초로 떠올랐다.

유엔군 측이 자유 송환을 계속 들고 나온 것은 공산군 측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함과 아울러 북한과 중국의 체면을 여지없이 구김으로써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명예로운 마무리를 하고 싶은 속내로 보였다.

게다가 유엔군 측에 수용된 공산군 포로는 13만 명 정도인데 견주어, 공산군 측에 수용된 유엔군 포로는 1만 1천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유엔군 측은 북한에 억류된 유엔군 포로가 적어도 5~6만 명은 되리라는 예상했으나,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자 이에 포로의 일대일 교환과 '자유송환'을 줄기차게 주장했던 것이다.

유엔군 측은 자존심 경쟁에 따른 잔류 포로의 확보를 위하여 수용소 내에서 대대적인 포로 전향공작을 폈다. 유엔군 측은 포로들에게 민간 정보교육과 공민교육을 통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주입시켰다.

유엔군 측은 이 교육을 통하여 다수의 친공 포로들을 반공 포로로 전향시켰다. 또 반공 포로로 전향한 자에게는 '멸공통일' '반공'과 같은 글자나 태극기를 팔뚝이나 배, 등에 문신으로 새기게 했다. 이는 나중에 반공 포로들이 변심하여 고향에 가려고 해도 문신 때문에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치졸한 조치이기도 했다.

a  게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야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교육을 받고 있다(1951. 6. 26.).

게제포로수용소 포로들이 야외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 교육을 받고 있다(1951. 6. 26.). ⓒ NARA, 눈빛출판사


a  중국군 포로 팔뚝에 새겨진 글씨 '반공 항아(反共抗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러시아에 항거한다)'.

중국군 포로 팔뚝에 새겨진 글씨 '반공 항아(反共抗俄,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러시아에 항거한다)'. ⓒ NARA, 눈빛출판사


포로 송환문제

정전회담장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포로 송환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양측은 서로 상대를 압박하고자 무력 공세도 서슴지 않았다. 유엔군은 폭격기로 북한의 수풍, 장진댐을 비롯한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였고, 그밖에 군수공장에도 폭탄을 쏟아 부었다. 공산군도 이에 맞서 지상공세를 강화하자, 정전회담 기간 중 전선에서는 포로로 잡힌 병사보다 훨씬 더 많은 병사들이 죽어갔다. 1951년 8월 공산군 측은 정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개성 일대에 대한 야간 폭격에 격분하여 정전회담 결렬을 선언했다.

그러자 1951년 9월 6일 유엔군 측 리지웨이 사령관이 이를 타개하고자 회담장소를 바꾸자고 제의하여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겼다. 하지만 양측 대표들은 회담장소가 바뀌어도 여전히 정전회담장에서 지루한 입씨름만 벌였다. 그런 가운데 전쟁 당사국들에게 정전회담을 조속히 매듭지어야 하는 사정이 발생했다.

미국은 1952년 말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가 당선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아이젠하워는 군 출신이지만, 대통령선거에서 한국전쟁의 종전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미국인들은 1 ․ 4 후퇴의 악몽을 잊지 않고 있었던 터라, 아이젠하워의 대선 종전 공약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출범하지마자 한국전쟁을 끝내고자 적극 노력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취임 전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전선을 조용히 시찰하기도 했다.

그런데다가 소련은 1953년 3월에 스탈린 수상이 사망했다. 스탈린 사망은 소련의 미국에 대한 냉전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중국 역시 내전을 마친지 1년 만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터라 국내 사정은 마냥 한국전쟁을 오랫동안 끌게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3년 5월, 공산군 측은 유엔군 측의 주장을 반영한 포로교환 수정안을 제시했다. 그 수정안은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에 넘겨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수정 포로교환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정전회담의 최대 난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였다.

a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에서 미군들을 시찰하고 있다(52. 12.).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당선자가 취임에 앞서 한국전선에서 미군들을 시찰하고 있다(52. 12.). ⓒ NARA, 눈빛출판사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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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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