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단양에 있는 정도전 동상의 상단을 스케치한 그림.
김종성
정도전은 한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참모였다. 그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창업했을 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건국이념·대외관계·경제체제·정치체제·사회체제·종교철학·도시구조 등을 거의 혼자 힘으로 설계했다.
정도전은 중국의 전설적 참모들인 주공단·장량(장자방)·주은래(저우언라이) 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이들보다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정도전처럼 국가의 구도를 전면적으로 설계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더 나은 게 있다면, 이들의 나라가 정도전의 나라보다 땅덩어리가 훨씬 더 컸다는 점뿐일지 모른다.
정도전에게는 이들과 자신을 차별화하는 내면적 특성이 있었다. 바로 그 특성 때문에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1부] 정도전은 왜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었을까[2부] 여운형·김구·이승만... 정도전은 누굴 선택했을까정도전의 내면적 특성은 바로 그의 야심이다. 그것은 참모로서의 야심을 분명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군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주군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자기를 헌신해서 주군의 의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참모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만 품었을 뿐, 이성계의 뜻을 세상에 펼치겠다는 목표는 품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조선 건국 직전에 정도전이 술자리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기용한 것이다."이성계가 자기의 머리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성계의 군대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참모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모치고는 아주 '불순'한 참모였다.
기원전 11세기에 활약한 주공단은 친형인 주나라 무왕을 보좌할 때나 조카인 성왕을 보좌할 때에 혹시라도 자신이 야심적인 인물로 비치지 않을까 항상 고심했다.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에 따르면, 그는 무왕과 성왕을 염려하는 글을 써서 상자에 넣은 뒤 "이런 사실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이 문서는 훗날 세상이 주공단을 의심할 때 그를 구하는 수단이 됐다. 세상은 그가 혹시라도 조카인 성왕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시점에서 세상에 공개되어 주공단을 구한 것이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문서였다. 어쩌면 그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문서를 미리 작성해두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주공단이 2인자의 철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기원전 3세기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량(장자방)은 자기 역할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초야로 돌아갔다. "내 주량은 딱 여기까지야"라며 소주 두 잔만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그는 자기의 역할을 건국의 도우미에 명확히 한정했다. 덕분에 그는 다른 참모들처럼 토사구팽을 당하는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2인자의 미학을 잘 실천한 인물이었다.
모택동(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주은래도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모택동보다 상급자였다. 하지만 대장정 중인 1935년 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제1차 확대회의에서 모택동과의 지위가 역전된 뒤로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모택동을 충실히 보좌했다. 그는 수십 년간 모택동과 함께하면서도 항상 모택동을 어려운 사람처럼 대했다.
이들과 달리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성공한 뒤부터 2인자의 길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그는 신생국 조선의 거의 모든 것을 직접 다 설계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불씨잡변>이란 책을 써서 불교 비판과 유교 확립에 나서고, <조선경국전> 등을 비롯한 법률까지 직접 만들고,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국사>까지 편찬했을 정도다. 그의 활약상은 분명히 임금인 이성계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인 주상은 이성계이고 실질적인 주상은 정도전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이뿐 아니라 정도전은 한양의 사대문과 각 동네의 지명까지 직접 만들었다. 군사훈련의 매뉴얼을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그것으로 훈련한 군대를 갖고 요동(만주) 정벌을 단행하려 했다. 1392년~1398년 기간의 조선은 분명히 정도전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라였다. 주공단·장량·주은래 등이 옆에서 지켜봤다면, "이성계는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라며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자신이 평생 이룩한 결실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주군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의외의 일격을 받고 건국 6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요동을 지배하는 나라, 조선', '재상 중심의 나라, 조선'처럼 그가 세운 청사진은 그의 죽음과 함께 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실, 정도전의 실패는 그가 참모 역할을 버리고 실질적 주상이 되는 그 순간에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도전은 조직력과 자금력이 약해서 자기 조직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우수하고 이성계의 신임이 두텁다 해도 그가 자기 뜻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도자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이에 더해,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을 잘 다루지 못한 것도 정도전을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방원을 포함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 정벌이란 기치 아래 온 나라를 단결시킨 정도전은 '고작' 왕자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이유와 관련하여 좀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순히 이성계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방원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도 마음대로 다룬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계의 아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니,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