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
KBS
공민왕 시대에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한 이인임은 1374년 공민왕 피살 사건을 계기로 권력의 정점에 진입하게 된다. 공민왕이 피살되자 어머니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아들인 왕우를 배제하고 왕실의 종친 중에서 차기 임금을 뽑으려 했다.
열한 살인 왕우는 나이도 어렸지만, 무엇보다 공민왕의 친자가 아니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왕우의 어머니인 반야는 공민왕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 개혁가 신돈의 여종이었다.
반야는 신돈의 소개로 공민왕을 만났다. 이런 인연 때문에, 신돈이 사형을 당한 뒤 '왕우의 진짜 아버지는 임금이 아니라 신돈'이라는 소문이 시중에 퍼졌다. 명덕태후가 왕우 대신 다른 사람을 차기 임금으로 세우려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때 이인임은 왕우에 대한 지지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왕우의 혈통에 관한 논란을 진압하고 왕우를 주상 자리에 앉혔다. 이 임금이 바로 고려 제32대 주상인 우왕이다. 우왕은 조선의 광해군·연산군처럼 자리에서 쫓겨난 임금이다. 그래서 정식 시호도 없이 그냥 자기 이름 그대로 우왕으로 불린다.
오늘날의 국민국가에서는 국민적 지지로 선출된 지도자가 통치자의 정통성을 갖는다. 이에 비해 왕조국가 시대에는 선왕의 혈통을 받은 지도자가 정통성을 가졌다. 그래서 선왕의 혈통이 아니라는 혐의를 받는 것은 왕조시대 통치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했다는 혐의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우왕을 적극 이용한 남자우왕은 진실 여하와 관계없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완벽한 정통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인임은 그런 우왕을 강력하게 호위했다. 이래서 우왕은 이인임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이인임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전성시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인임 정권은 1388년 최영-이성계 연합세력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14년간이나 유지되었다. 독재자 전두환보다 두 배나 더 오래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인임은 우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그가 정권을 잡은 기간은 고려왕조의 끝자락이었다. 그가 무너지면서 고려왕조 해체론이 부상하고 4년 만에 고려가 멸망했으니, 이인임 정권은 고려 최후의 장수 정권이었다.
이인임이 집권한 시기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구질서와 신질서가 충돌하는 때였다. 명나라의 신(新)패권과 몽골의 구패권이 어느 정도는 공존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모든 게 불안정해서 미래를 장담하기 힘든 때였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이인임은 무려 14년간이나 철권통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불안정한 시대에 그의 권력은 꽤나 안정적이었다. 그가 집권한 14년간은 사실상 '이씨 고려'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인임은 14년간 독재하고 박정희는 18년간 독재했지만, 실질적인 면을 따지면 이인임이 박정희보다 몇 수 위였다. 박정희는 군부를 거느렸지만, 이인임은 그런 것이 없었다. 박정희 시대에는 박정희를 돕는 미국의 패권이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이인임 시대에는 동아시아 패권이 확실히 정착되지 않은 탓에 고려 정권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만한 외세가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와 외세에 의존한 박정희에 비해, 이인임은 상당 부분은 자기 스스로 정권을 지켜내야 했다. 물론 이인임도 몽골에 의존한 적은 있지만, 당시의 몽골은 이미 한 물 간 나라였다. 이런 점들을 보면, 이인임은 박정희보다도 몇 수 위였다. 당연히, 전두환 같은 사람은 근접도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