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도착한 뒤 선비 복장을 갖춘 도민준(김수현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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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비행물체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1609년 가을에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사람은 양양 주민인 김문위다. 그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비행물체를 목격한 사람이다. 그의 목격담에 따르면, 세숫대야 같은 물체가 처음 발견된 장소는 그 집 마당이었다. 잠시 뒤 이 물체는 저절로 공중으로 뜨다가 둥글게 회전하면서 멀리 사라졌다. 비행물체가 뜨면서 회전할 때에 사람이나 물건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집 마당이 꽤 넓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김문위처럼 비행물체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상당히 흥분했겠지만, 사건을 보고 받은 조선 정부의 태도는 담담했던 것 같다. 정부에서는 강원감영(강원도청)의 보고를 허무맹랑하다고 무시해버리지 않았다. 이형욱은 하급 수령들의 보고를 종합해서 중앙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형욱의 보고서 제출 과정이 합리적이었다고 이해한 듯하다.
중앙에서 이형욱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은 광해군 2년 9월 6일 자(1610년 10월 22일자) <광해군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이형욱은 보고서를 올린 지 1년 뒤에 광해군의 승지(비서관)가 되었다.
관찰사는 종2품이고 승지는 정3품이지만, 승지는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관찰사보다 더 나은 자리다. 만약 광해군이 이형욱을 '미친 사람'이나 '얼빠진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이런 인사조치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형욱의 보고서를 접한 사관(역사 기록관)들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관들이 이 보고를 역사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을 실각시킨 인조 정권의 사관들도 광해군 시대 사관들의 기록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조시대 사관들이 <광해군일기>를 편찬할 때에 이형욱의 보고서를 수록했던 것이다.
혹시 당시 사람들이 유성을 비행물체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광해군 1년 8월 25일 자(1609년 9월 22일 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강원도에서 비행물체가 발견된 날에 한양에서는 유성이 발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발견된 것도 유성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유성이나 혜성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신라 첨성대, 고려 첨성대, 창경궁 관천대(첨성대로도 불림), 관상감 관천대의 존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인간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천체를 관측했다. 그래서 고대인들도 유성이나 혜성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광해군 시대 사람들이 유성을 비행물체로 착각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특히, 비행물체가 땅 위에서 하늘로 솟았다는 김문위의 목격담을 보면, 이것이 유성이 아니었다는 점이 더욱 더 확실해진다. 유성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609년에 출현한 물체는, 외계에서 온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상한 비행물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에서 발견된 비행물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반응이 나타났을 것이다.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 말도 안 된다며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파악한 조선 정부의 태도는 '이상하고 신비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상을 확인할 수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한다'는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광해군 시대와 인조 시대의 사관들이 이형욱의 보고서를 역사기록으로 인정하면서 이에 관해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은 점을 볼 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확실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판단을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UFO 문제에 관한 조선사회 상층부의 대략적인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