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기황후>.
MBC
충혜왕과 기황후는 정치적으로 긴밀한 사이였다. 물론 MBC 월화드라마 <기황후>에서처럼 연인관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저 정치적 관계였다. 이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기황후가 충혜왕에게 약 주고 병 주는 관계였다. 병 주고 약 준 게 아니라 약 주고 병 준 관계였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이 기사를 읽어내려 가자.
참고로, 드라마 속 고려왕의 이름은 왕유이고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이지만,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점은 지난해 11월 29일자 기사(
죽은 아버지의 여자 건드린 아들... 자기 무덤 팠다)에서 이미 설명했다. 역사기록에 구애받지 않고 기황후와 충혜왕의 사랑 이야기를 창작할 목적으로 드라마 <기황후>에서 충혜왕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는 점도 설명했다.
충혜왕은 열여섯 살 때인 1330년에 아버지 충숙왕으로부터 대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자기 쪽 사람들이 충혜왕 정권에서 소외되자 충숙왕은 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여 아들을 왕위에서 몰아냈다. 충숙왕이 몽골의 지원을 배경으로 아들을 실각시킨 때는 1332년이었다.
아버지한테 왕권을 빼앗긴 충혜왕은 몽골 수도 대도(지금의 북경 절반+그 위쪽)로 갔다. 그가 대도에 간 지 얼마 뒤인 1333년에 <기황후>에서 타환(지창욱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몽골 황제 토곤테무르가 등극했고, 뒤이어 궁녀 기씨(훗날의 기황후, 하지원 분)가 토곤테무르의 시녀로 발탁되었다.
몽골에서 충혜왕은 몽골 조정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 이와 별도로 그는 플레이보이의 삶을 사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다. 몽골인들이 망나니라고 부르며 혐오할 정도로 그는 여자를 몹시 밝혔다.
충혜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 두 가지<논어> 본문의 첫 구절인 "큰 배움의 길은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를 엉뚱하게 이해했는지, 그는 밝은 덕이 아니라 예쁜 여자를 밝히는 데서 큰 배움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면서도 권력투쟁에 대한 집중력도 잃지 않았다. 학교 밖에서는 문제아, 학교 안에서는 반장. 충혜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왕권을 빼앗긴 지 7년 뒤에 충혜왕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왕권을 회복했다. 때는 1339년, 충혜왕이 스물다섯 살 때였다. 그가 왕권을 회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셋이다.
하나는 아버지 충숙왕이었다. 충숙왕은 살아생전에는 아들과 권력투쟁을 벌였지만, 죽음에 임박하자 아들에게 왕권을 넘겨주는 쪽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또 하나는 새롭게 몽골의 실권을 차지한 탈탈이었다. 그는 충혜왕의 왕권 회복을 지지했다. 또 다른 하나는 기황후였다. 기황후는 친정집인 기씨 가문을 통해 충혜왕의 복권을 도왔다.
이처럼 충혜왕은 왕위를 되찾는 과정에서 기황후의 도움도 크게 받았다. 이것은 충혜왕이 몽골에 있는 동안, 기황후의 신임을 받는 데 주력했음을 의미한다. 이 당시, 두 사람의 관계는 기황후가 충혜왕에게 '약'을 주는 관계였다.
복위에 성공한 충혜왕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여자를 밝히는 일에 보통 이상의 에너지를 소모했다. 이것은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그가 너무 좋아해서 그의 권위를 더욱 더 떨어뜨리는 데 기여한 또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돈이었다.
수입 상당부분을 사치와 방탕에 허비한 충혜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