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더 이상 은신술에 의존하지 않겠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 15] 탈출(1)

등록 2014.02.10 16:12수정 2014.02.11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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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무영객은 픽, 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이들이 혹시 있을지 모를 미행을 따돌리고, 마차 안에 있는 자의 방향감각과 거리측정에 혼선을 주기 위해 우회를 한다는 짓거리가 그에게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마차를 그런 식으로 몰며 고작 금릉부 주위를 돈다는 것은 오히려 나를 따라라, 하며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대로 미행을 따돌리고 안에 있는 자의 거리감을 없애려면 적어도 마차를 두 번 이상 갈아타고, 논길과 자갈길 그리고 숲길을 번갈아 달려야 한다.

후훗,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하의 은화사 요원들이 이 정도라면 자신 있다. 은화사는 강호에 제법 명성이 있는 자들만 추려낸다던데 이는 그저 무공만 믿는 둔자(鈍者)들 아닌가. 무영객은 강호의 고수들이란 자들이 자신의 검에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는 이유가 그들이 자신의 무공만 믿는 객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형과 지물을 예리하게 파악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무공의 대결은 상대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넓은 개활지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실전은 그렇지 않다. 특히 기습이나 우발적 대결에 있어서는 무공 외의 다른 요소가 승부를 가른다. 지형과 지물의 유, 불리가 있고, 나아감과 물러섬의 진퇴가 다르고, 무엇보다 기세(氣勢)의 강약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합친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을 타는 자가 승리한다. 승리는 곧 목숨이다. 객기와 호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림인들이 새벽이슬에 자신의 목을 적셨던가. 

그들이 나름 미행을 따돌리며 갔다는 곳이 기껏 사대문 안 관부 부청과 열 마장도 안 떨어진 저택이었다. 나름 비밀 은가같이 한다고 했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곳이 수상쩍은 저택이이라는 건 금세 파악할 것이다.

우선 드나드는 사람이 너무 적다. 대로에서 약간 비껴나고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긴 했지만, 장원에 준하는 저 정도 규모의 저택이라면 문간 청지기를 비롯해 드나드는 상인과 잡인들의 적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솟을 대문 옆의 문간방은 개방을 해놓고 출입을 쉽게 하는 것이 일반 저택이다. 하지만 그곳은 굳게 닫혀 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열릴 때마다 눈빛이 심상치 않은 사내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밖을 쳐다본다.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은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은화사 금릉부의 당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은가의 운용만큼은 낙제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무영객은 뒷동산 반대편에 말을 매어놓고 나무 위에 올라 저택을 조망했다. 진입 동선과 탈출 동선을 눈으로 파악했다. 다시 한 번 은화사 금릉부 당두의 허술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대문의 문간방을 꼭꼭 닫아 놓아 오히려 이목을 끈 것도 실수지만 후원 담벼락에 경계 초소 하나 정도는 두어야 했다. 설령 그곳에 인력을 배치하지 않더라도 초소 하나가 있는 것만으로도 침입자는 경계심을 돋우고 침투로를 수정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적의 주의력을 소모시키는 것이다. 어느 누가 감히 은화사에 침입할 것인가 하는 자만일까.

그렇다면 이건 행운이다. 자만은 곧 자멸(自滅)이다. 스스로 자멸하는 상대야 말로 손 안에 든 떡이다. 조금씩 식혀 가며 먹으면 된다. 혹은 은가라는 속성 상 노출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표시를 내지 않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후원에 침투 가능한 동선을 예상해 그 어딘가 쯤에 경계 인원이 있어야 했다. 특히 오늘처럼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무영객은 손쉽게 후원의 담을 넘었다. 안채에 침투하기 전 후원의 은행나무에 올라가 다시 주위를 살폈다. 장검을 비스듬히 비껴든 자가 하나 안채 담벼락을 따라 거닐고 있다. 음, 아주 먹통은 아니구먼. 적어도 안채를 경계할 정도의 인원은 두었으니. 무영객은 더 이상 은신술에 의존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장검을 멘 자가 안채를 돌아나가자 그는 은행나무에서 안채의 담벼락을 향해 경신술을 펼쳤다. 그가 담장 기와를 밟고 공중에서 한바퀴 빙그르르 돌아 착취한 다음 안채의 벽면에 등을 대고는 좌우를 살폈다. 건물을 돌아 문으로 가려는 순간 모퉁이에서 장검을 멘 자와 마주쳤다.

"누, 누구…,"

그자는 누구냣! 라는 말을 끝까지 내뱉지 못했다. 목안의 성대가 순간적으로 벌어져 소리가 샜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내지른 소리가 왜 안 나오는지 영문도 모른 채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를 자신의 것이 아닌 양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쿵, 하고 앞으로 쓰러졌다.

무영객은 협봉도를 손에 쥐고 가볍게 손등으로 돌렸다. 이런 식으로 손목을 부드럽게 풀어주어야 검의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은행나무에서 살펴 본 것에 의하면 안채 건물은 대략 중간 규모의 객잔과 같은 크기였다. 정면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옆 창을 뚫을까 하다가 대낮인데 귀찮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일은 어차피 노출이 되게 돼 있다. 현재로선 은화사가 끌고 간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서생을 다시 데려와 추문하는 수밖에 없다. 그 서생만이 모충연이 임종 직전에 남긴 최후의 말을 들은 자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무극진경에 관한 정보일 것이다.

은화사가 추문을 해서 정보를 캐내기 전에 내가 다시 데려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신속해야 한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서생은 입을 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일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일을 맡긴 자에 대한 충성 때문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일을 완수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될 뿐이다. 자, 정면돌파다.

그는 본채의 정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중앙의 거실에 앉아 있던 사내 둘이 "뭐야!" 하고 소리쳤다. 동시에 하나는 장검을, 다른 하나는 폭이 넓은 박도(朴刀)를 허리춤에서 치켜들었다. 장검과 박도, 동시에 내지르는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선 보법이 중요하다.

위험하다. 한 명이 장검으로 거리를 확보한 다음 다른 한 명이 박도로 휘두른다면 움직일 공간이 막힌다. 무엇보다 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행히 거실은 널찍했다. 구석으로 몰리면 안 된다. 무영객은 협봉도를 손목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행동이다.

무영객은 왼손잡이다. 그가 앞발인 오른발을 쿵,하고 내딛자 장검이 오른 어깨 쪽으로 찔러왔다. 동시에 박도가 허리께로 베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다. 무영객은 순간적으로 바닥에 누우면서 등을 한바퀴 돌렸다. 그것은 누가 보면 무영객이 박도에 한 칼을 맞고 쓰러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한 박자 빨랐다. 무영객은 박도의 예상 각도를 아슬아슬하게 비끼며 누운 다음 협봉도로 박도를 휘두른 자의 발목 힘줄을 베었다. 동시에 왼발로 장검을 가진 자의 턱을 밑에서 위로 걷어찼다. 하나는 쓰러지고 하나는 나가떨어졌다.

와검세(臥劍勢)와 거합세(擧合勢)의 응용이다. 한 동작에 두 가지 자세를 신속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이 검법의 핵심이다. 나가떨어진 장검이 다시 일어선다. 이 자가 자세를 잡기 전에 공격해야 한다. 무영객은 순식간에 바닥을 굴러 왼다리로 장검의 발목을 걷었다. 그와 동시에 협봉도를 아래에서 위를 향해 사선으로 그었다가 팔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멈췄다. 그의 칼끝에 묵중한 무게감이 전달됐다. 제대로 걸렸다. 그는 재빨리 협봉도를 빼냈다. 경련이 시작되면 뽑기가 힘들어진다. 피비린내가 무지개처럼 펼쳐졌다.

장검은 일어서자마자 적이 굴러와 자신의 발목을 걷어차자 놀라 뛰었다.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가슴이 콱, 막혔다. 가위 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이럴 때가 아냐, 장검을 모아쥐고 적을 향해 겨누는 순간 그는 자신이 왜 쓰러지는지 몰랐다. 그저 멀리서 적이다! 하는 소리만 아스라이 들릴 뿐이었다.

무영객이 장검을 해치우고 쓰러진 박도에게 다시 일격을 가했다. 그 순간 안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한 사내가 잠시 얼어붙더니 이내 소리쳤다. 적이다! 그는 공격하는 대신 급히 문을 닫았다. 이어 어딘가로 뛰어 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무영객이 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훅 밀려들어 왔다. 지하실 입구다. 계단이 있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 다섯 평 정도의 공터가 있다. 공터의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졌다. 그 중에서 왼쪽 복도는 등잔으로 불을 밝혀 놓고 오른쪽은 어두웠다.

일단 오른쪽 통로를 향했다. 그쪽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으니 몸을 숨기거나 탈출로가 있는지 살펴봐야 했다. 일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왼쪽 통로로는 세 걸음을 가자 문이 하나 있다. 살며시 열어보니 꼼짝하지 않았다. 빗장이 걸려있고 자물쇠가 잠겨 있다. 밖에서 잠갔다면 안에는 아무도 없다는 결론이다. 계속 통로가 이어졌다. 더 이상의 방은 없다.

대개 지하실 구조는 어딘가에 통풍구를 설치해놓기 마련이다. 무영객은 멈춰 서서 전신의 감각을 세웠다. 안쪽 통로에서 미세하게 바람이 흘러들어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가벼이 하고 걸어갔다. 십칠 보(步) 거리에서 위에서 미풍이 스며들었다. 협봉도를 거꾸로 쥐고 손잡이를 위로 밀어보았다. 덮개가 살짝 움직이며 빛이 틈새로 비쳤다.

그는 덮개를 제자리에 놓고 크기를 살펴보았다. 가로 세로 대략 석자 정도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 애초에 통로로 만들었다가 통풍구로 용도를 변경한 것 같았다. 다시 이보를 전진하자 막혀 있다. 손을 뻗어 벽을 만져보니 딱딱한 바위다. 그러니까 이쪽 복도는 지하실을 구축하다가 바위가 있어 포기했구나. 그는 만약 드잡이질이 벌어지면 될 수 있으면 절대 이쪽으로 몰려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덧붙이는 글 # 미리 보는 다음회

오, 이런. 그는 손목의 힘줄이 끊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한발 물러나 수비자세로 바꾸는 순간 아랫배가 화끈했다.
당했다!
그는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보다,
상대가 어찌 자신의 검과 단 한 번의 부딪침도 없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빈틈을 정확히 벨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곤 쓰러졌다.

- 월, 수, 금, 주3회 연재합니다.
#무위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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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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