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지기에게 뒤통수... 아버지가 달라졌다

[부모님의 뒷모습 ④] 잘못 선 보증으로 집 날릴 뻔

등록 2015.05.13 21:37수정 2015.05.13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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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선 보증으로 갑자기 생긴 빚. ⓒ freeimages


은행에서 등기가 왔다. 돈을 갚으라는 최후 통첩. 안 그러면 법적 절차를 밟을 거란다. 우리가 쓴 돈도 아니다. 아버지가 지인에게 서준 보증이 문제였다.


"그 친구가 지금 어려워서 은행 이자를 못 낸 거고, 좀 있다가 돈 들어오면 다 낸다고 했어."
"아니,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엄마가 아버지에게 따졌다. 아버지는 여태 별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은행에서 온 등기 우편을 받고 보니 아버지 말을 믿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란 판단이 들었다. 결혼한 언니, 오빠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보증 문제로 집안이 '발칵'

아버지가 보증을 서준 분은 10년 이상을 알고 지냈다. 그 분은 이불 대리점을 했고 아버지는 화장품 대리점을 했다. 우리가 집을 이사할 때 직접 오셔서 집터가 풍수지리 상 좋은지 봐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아버지가 화장품 장사를 하는 동안 가장 의지하며 지낸 분이었다.

두 분은 돈을 빌리면서 서로 보증을 서주게 되었다. 보증을 선 액수도 똑같았다. 천만 원씩. 벌써 20년 전, 내가 스물넷 정도 되었을 때 일이니 적지 않은 돈이다. 맞보증을 서면 그쪽이 안 갚을 때 우리도 안 갚아도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안전하다고 아버지가 생각하셨나 보다.


아버지 친구 분이 소유하고 있는 집의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기로 했다. 짬을 내어 등기소에 들렀다. 지금이야 인터넷을 접속해 손쉽게 등기부 등본을 뗄 수 있었지만, 그때는 등기부 등본을 떼려면 등기소에서 신청을 한 뒤 몇 시간 뒤에 찾으러 가야 했다. 등기부 등본을 언니에게 전했다.

우편을 보낸 은행 지점도 찾아갔다. "우리 아버지가 어떤 서류에 사인하신 건지 보고 싶어요" 사실 확인을 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때 은행을 왜 찾아갔는지 모르겠다. 은행 직원은 당황했다. "그 서류는 보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억울해도 우리가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은행에서 나왔다.

언니는 변호사와 상담을 하고 들은 말을 전했다.

"변호사가 그 아저씨네 등기부 등본이 너덜너덜하데. 하도 저당이 많이 잡혀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가 갚아야지. 안 갚으면 우리 집이 경매로 넘어가. 은행은 누가 돈을 썼는지는 상관없어. 누구 돈을 받는 게 편한가가 중요하지."

결국, 집을 날리지 않기 위해서 대출금은 우리가 갚아야 했다. 빚을 갚으려면 목돈이 필요했다. 엄마와 내가 머리를 맞댔다. 생각해낸 방법이라고는 우리가 살던 1층을 전세로 세놓고 우리 집의 반지하로 이사하는 것밖에 없었다.

우리 집 1층은 방이 세 개로, 반지하보다는 전세금을 훨씬 더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엔 반대하다가 결국 우리 뜻을 따르셨다. 1층을 전세로 내놓았다. 그런데 그사이 은행이 우리 집에 근저당을 설정했다. 근저당 때문에 전세 계약이 잘 안 됐다.

어느 날 시집 간 작은 언니가 친정에 왔다. 마침 집 보러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집을 보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근저당 때문에 계약을 주저했다. 순발력 있는 언니가 나섰다.

"근저당 때문에 걱정되시죠? 그런데 우리 집 시세에 비하면 근저당 설정 액수가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전세금 받으면 제일 먼저 근저당부터 해지할 거에요. 그러니까 근저당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그 날 전세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받은 전세금으로 은행 빚을 갚아 근저당 설정을 말소할 수 있었다. 얼마 뒤 아버지는 화장품 장사를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0년 이상 가깝게 지냈던 사람에 대한 배신감이 아버지가 장사를 접게 하는 데 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 외에도 이유는 많았다. 장사가 너무 안 되는 데 반해 비용은 꼬박꼬박 지출해야 했다. 대학을 다니던 내가 졸업을 앞둔 것도 이유가 됐다.

엄마의 기도 "제발 집만 넘어가지 않게 해주세요"

아버지는 본사에 계약 해지를 원한다고 연락을 했다. 그런데 창고 가득 쌓인 화장품이 문제였다. 재고품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좁지도 않은 창고에 그 작고 비싼 화장품이 천장까지 꽉 차 있었다. 화장품 사이로 한 사람이 간신이 지날 통로가 조그마하게 있었다. 그뿐 아니라 창고는 다른 업체와 같이 썼다. 그러니 물건이 없어져도 어쩔 수 없었다.

재고 조사를 위해 엄마가 휴일에 창고에 갔다. 엄마는 창고에 쌓인 화장품을 보고 깜짝 놀란다. 엄마는 이 물건이 반품 처리가 되지 않는다면 집이 날아가겠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매일 밤 기도를 했다.

"제발 집만 넘어가지 않게 해 주세요."

다행히 재고품 반품 처리가 잘 해결됐다. 하지만 창고에서 없어진 물건이 꽤 있었다. 그래서 수백만 원을 물건값으로 물어줘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화장품 장사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봉고차에 싣고 다니며 끝까지 팔았던 화장품들은 반품 처리를 하지 못했다. 물건은 큰 박스로 네 박스였다. 아버지는 화장품 네 상자를 집에 가져 왔다. 그렇게 쌓아두면 쓰지도 못하고 버리게 될지도 몰랐다. 반값이라도, 아니 다만 얼마라도 돈을 건지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오빠가 와서 화장품을 실어갔다. 처분할 방법이 없다면 새언니랑 오빠가 주변에 팔아보겠다고 했다. 얼마 뒤 오빠가 화장품을 판 돈을 가져왔다. 적지 않은 돈이었다. 새언니와 오빠는 동네 아파트 앞에서 돗자리를 깔고 화장품을 팔았다. 구색도 안 맞는 물건을 그것도 길거리에서 판 거다.

딸인 나도 못했던 일을 며느리인 새언니가 했다. 그 어려운 일을 해 준 새언니가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동업했던 분에게 미처 받지 못한 돈이 있다는 말을 했다. 오빠는 그분의 집도 찾아갔다. 하지만 돈을 받아 오지는 못했다. 항상 부모님 속만 썩이던 우리 형제가 뭔가 부모님께 도움을 드릴 적은 그때가 난생 처음이지 싶다. 덕분에 집이 날아갈 뻔한 위기의 순간을 잘 넘겼다. 그리고 우린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그 후 몇 년간 아버지는 비슷한 악몽을 종종 꿨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잠자던 아버지가 보증을 서 준 친구 이름을 부르며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는 발길질까지 했다는 거다. 그 분이 작정하고 아버지에게 빚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는데도 아버지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마음을 내놓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일은 아버지 마음에 오랫동안 상처로 남았다. 수년간 했던 밥벌이를 그만둘 때면 어쩔 수 없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주기도 한다는 걸. 그래서 사회생활의 연륜이 길어질수록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수도 늘어난다는 걸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부모님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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