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길, 저 멀리 풍차가 보인다
황보름
"가파도 괜찮나요?"견과류가 들어간 요구르트에, 토스트, 샐러드, 과일이 맛깔나게 차려진 아침을 먹으며 남 사장님에게 물었다. 남 사장님은 내 질문에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함박웃음을 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당연하죠. 정말 좋아요. 특이 이런 날엔 더". 이런 날? 창 밖엔 구름이 살짝 낀 제주의 아침이 걸려 있다.
"햇볕이 너무 뜨거우면 지치기만 해요.""가파도 가보신 적 있으세요?""물론이죠. 여기 묵으시는 손님들에게 제가 가장 많이 추천해주는 곳도 가파도에요. 여기 있는 분도 어제 다녀왔어요. 좋으셨죠?"나와 같은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고 있던 여행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가려고 했던 곳인데 이런 긍정적인 반응을 보니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진다. 여기서 모슬포 항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가파도는 모슬포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들어가면 있는 섬이다. 보통 사람에게 20분이라면, 길치인 내겐 40분이 걸릴 수도 있으므로 시간을 넉넉히 잡고 출발하기로 한다. 가면서 동네도 둘러볼 겸.
바람막이 점퍼와 모자를 가방에 넣고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한적함을 넘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니 큰 길이 나온다. 어제 버스에서 내려 걸어왔던 길이다. 어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면 모슬포항 쪽이다. 골목골목, 우회전에 우회전을 거듭하자 서서히 공기가 달라진다. 바다내음인가? 비릿한 생선 냄샌가? 아침부터 서 있는 시골 장을 지나 모슬포항 입구에 도착했다.
모슬포항은 분주하게 아침을 맞고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도 제법 많았다. 어쩌면 어부들에겐 이 아침의 식사가 지난밤의 노고를 다독여주는 따뜻한 누군가의 어루만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두를 지나 매표소에 도착했다.
매표소 안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메르스의 영향으로 요즘 제주도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데, 그럼에도 마라도처럼 유명 여행지엔 사람들이 꾸준하다. 물론, 메르스가 아니었다면 여행객들은 더 많았을 것이다. 대부분이 마라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서 있다. 나는 가파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청보리철이 아니면 가파도를 찾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꼬맹이 섬이라 끌린, 가파도 가파도는 어느 게스트하우스 스텝을 통해 알게 된 곳이다.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스태프 몇 명이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다. 휴가를 낸 스태프 한 명이 가파도로 갔다는 것. 간 이유는 황금보리 사진을 찍으려던 것. 그런데 그 스태프가 다음 날 와서 다른 스태프들에게 말하길, "황금보리도 끝났더라"고 했다.
가파도는 올레길 완주를 목표로 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와야 하는 곳이다. 올레 10-1코스가 이곳에 있다. 하지만 올레길을 걷지 않는 사람들도 4, 5월이 되면 가파도로 몰려온다. 바로 청보리 때문. 청보리가 땅을 가득 덮은 봄, 가파도에선 청보리 축제가 열린다.
스태프가 말한 황금보리는 청보리가 익어 황금빛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 황금보리가 펼쳐진 가파도의 6월은 사진가들의 천국이라고 한다. 물결처럼 출렁이는 황금보리의 자태가 그렇게나 아름답단다.
지금 가파도를 가면 황금보리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가파도를 가는 이유는? 가파도가 꼬맹이라는 말을 들어서였다.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이다. 해안선 길이도 4.2km로, 한 시간 남짓 걸으면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자그맣고 낮은 섬 가파도. 나는 이 작은 꼬맹이 섬이 끌렸다.
신분증과 승선 신고서를 내밀며, 떠나는 시간, 돌아오는 시간을 매표소에 대고 말했다. 돌아올 시간을 미리 정해야 한다는 게 영 못마땅했다. 놀다 보면 더 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거늘. 또 생각보다 별로라면 빨리 돌아오고 싶을 것 아닌가. 그런데 미리 시간을 정해놓고 가야 하다니. 대충 보니 사람들은 대개 1시간 또는 2시간 정도 가파도에 머무는 듯했다. 아쉬울지 몰라 나는 3시간 머무는 걸로 정했다.
표를 구입한 뒤 매표소 바로 앞에 있는 선착장으로 가 가파도로 돌아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곁에 섰다. 재미있게도 할머니들은 한 분도 빼놓지 않고 하나 같이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있었다. 제주 메인 섬으로 나올 때마다 하나씩 꼭 챙겨 들고가는 필수 아이템인 듯 싶었다. 할머니들 옆엔 검은색 양복을 빼 잎은 할아버지 몇 분이 서 있었는데, 이 아침에 어디들 갔다 오시는 걸까. 궁금증은 자연스레 풀렸다. 누군가의 상을 치르고 오는 길이란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배를 기다렸다. 그러다 선착장 앞 플래카드에 눈이 갔다. 글이 써져 있었다. 몇 번을 읽어 보았다.
울지마라, 딸아.아무리 거센 파도라 해도 언젠가는 잠잠해지니,때가 되면 차오르는 밀물처럼, 때가 되면 밀려가는 썰물처럼인생은 그런거란다.그러니 너무 두려워 말아라.어머니 바다가 너를 따뜻하게 품어 주리니.가파도 해녀가 쓴 글이었다. 그치, 가파도에도 해녀가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