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도 못 잡는데 요리라니, 학원부터 다녀봐"

[빅맥의 쉐프 도전기 14] 저녁노을이 물들어가는 세인트 킬다 해변

등록 2015.12.22 14:12수정 2015.12.22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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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을 보러 가기로 했다


트리서핑을 마치고 멜버른으로 돌아 올 때는 해안도로를 이용했다. 수영복을 가지고 가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후회가 될 정도로 아름다운 백사장이 계속 이어지는, 유원지 분위기가 완연한 길이었다. 해수욕·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해안에 넓게 퍼져 있었고, 해안과 도로 사이의 비교적 넓은 잔디밭 곳곳에서는 바베큐 파티로 인한 연기가 자욱했다.

단순히 소고기·소세지만 구워 먹었던 우리들과는 달리,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빵에 야채를 곁들여서 제대로 챙겨 만든 현지인들 바베큐는 더 맛있어 보였다. 그때 나는 금연 한달 반 정도 된 상태였는데 금단 증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고 빨리 금단 증상을 잊어 버리고 싶었는데, 비어있는 바베큐 장소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비어 있는 바베큐 장소를 찾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세인트 킬다 해변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도중에 해안가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백사장에서 놀다 오는 건데' 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어쩔 수 없이 바베큐는 포기하고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펭귄을 보러 가기로 했다.

세인트 킬다 해변은 맬버른에서 트램으로 30분이면 올 수 있는 유명 관광지다. 해변의 주차장은 아주 넓었지만 주말을 보내기 위해 놀러 온 사람들로 인해 빈자리가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펭귄을 볼 수 있는 방파제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 가기로 했다.

펭귄은 어두워진 다음에 나오기 때문에 아직 시간이 있었다. 저녁놀이 물들어가는 세인트 킬다 해변은 정말 아름다웠다. 일요일 저녁의 해변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사람들은 해변가에 기대거나 앉아서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호주인들이 유색인종들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그 사람들 대부분 뭘 잘 모르는 이방인에게 아주 친절했다.


학생 중에 아빠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있을까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한 세인트 킬다 해변 -수많은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다
저녁노을이 물들기 시작한 세인트 킬다 해변-수많은 요트들이 정박하고 있다정성화

길가에 앉아 있던 호주인들에게 물어 물어 목표장소와 시간을 정한 후, 해변을 따라 걸어 가면서 나는 경험자인 큰애에게 유학 상담을 받았다.


"은퇴 후 베이스 잡(base job)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다. 네가 다니는 학교에 나도 다니고 싶다. 그게 가능할 것 같니? 학생 중에 아빠같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 있어? 내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 뭐야?"

큰애는 먼저 영어 이야기를 했다.

"영어 실력이 떨어지니까 강의를 듣는 것이 너무너무 어려워. 오더를 듣지 못하고, 즉 셰프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셰프의 몸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기록해서 실습시간에 따라 하고 있어.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몰라. 1학기는 요리의 기본을 배우는 단계라서 이런 식으로 버틸 수 있지만 2학기부터는 동료 셰프들과 빠르게 대화하면서 호흡이 잘 맞아야 러쉬아워에 대한 대응이 가능한데 걱정이 많이 돼."

두 번째는 한국에서 미리 요리실습을 하고 오면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칼도 제대로 못 잡는 상태로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에 항상 시간 부족으로 쩔쩔 맸어. 아빠는 틈나는 대로 동네 요리학원에라도 다니고, 집에서는 엄마를 대신해서 요리를 많이 해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시간을 다투는 실습시간 때는 차이가 확실히 느껴질 거야. 그리고 요리에 대한 공부도 미리 해오면 셰프가 하는 강의내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유학에는 돈이 많이 들잖아. 최대한 단시간에 끝내야지."

세 번째는 학교에서 외국인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 좋으니까 너무 겁먹지 말라고 했다. 입학생 중 절반이 외국인이어서 학교에서 이들을 많이 배려하고 있으며, 큰애도 숙제 하다가 잘 모르면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마지막은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뚱뚱하고. 피부도 좋지 않고, 영어도 못해서, 즉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서 먼저 다가가지 못했는데 이제는 변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빠는 나이가 많아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과 잘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단다. 그러면 많은 것을 놓친다고.

이상이 큰애가, 자신이 지금도 겪고 있으며, 제대로 준비 안 할 경우 나도 겪어야 하는 외국인 학생으로서의 어려움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큰애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갑자기 현실이 된듯한 요리학교 유학이 두려움으로 왈칵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정말 할 수 있을까?

엄청난 인파 앞에 나타난 펭귄, 내 눈을 의심했다

펭귄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방파제 바로 밑에 펭귄이 살고 있다고 한다
펭귄을 보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방파제 바로 밑에 펭귄이 살고 있다고 한다정성화

세인트킬다 해변에는 거대한 요트 정박지가 있다. 그리고 파도로부터 요트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가 건설됐는데, 거기에 펭귄이 서식한다. 멜버른이라는 도시 자체가 입구가 좁은 포트 필립 베이 안쪽에 건설되어 외부의 파도로부터 자연적인 보호를 받지만, 만이 워낙 커서 그 내부에서도 이러한 방파제가 필요한 모양이다.

방파제 위에는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길이 있고, 중간쯤에는 아름답게 꾸며진 레스토랑이 있다. 저녁노을이 바다 한가운데로 난 방파제를 붉게 물들일 때, 우리는 그 길은 걷는 연인들, 가족들에 뒤섞여 즐겁게 걸어갔다.

방파제가 완전히 어둠에 싸인 후 엄청난 인파 앞에 나타난 펭귄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알고 있는 펭귄은 극지방에 사는 사람 크기 만한 동물이다. 그런데 우리 앞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쏜살같이 방파제 바위 틈으로 사라져 버리는 호주 펭귄은 닭보다 작아 보였다. 펭귄이 원래 저렇게 작은 건가?

허탈한 마음으로 주변을 보니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나 같이 신기해 하면서 사진을 찍느라 부산했다. 사진으로만 봤으면서도 내게 펭귄은 큰 동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아 보니 추운 지방에 사는 펭귄은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덩치가 크지만 온대나 열대 지방에 사는 펭귄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펭귄의 크기는 40cm에서 110cm까지 다양하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따라 나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해봤는데 워낙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여간 해서는 펭귄을 포착할 수 없었다. 펭귄 사진을 찍을 때 플래쉬 불빛이 펭귄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현지 관리인들이 노란색 셀룰로이드 비닐을 카메라에 붙이도록 했다. 비닐이 붙은 불편한 자세로 한 시간 정도 펭귄 사진을 찍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제대로 된 사진은 하나도 찍지 못하고 제풀에 지쳐서 우리는 돌아 가기로 했다.

큰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제는 시원해진 멜버른의 밤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호주에서 본격적인 첫날은 다소 허둥대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게 보낸 것 같다. 스마트폰만 켜면 내비게이션이 되니까 길 잃을 염려 없이 여기저기 마음대로 돌아 다닐 수 있었다. 트리서핑이라는 뜻밖의 게임도 해보고, 아름다운 세인트 킬다 해변에서 외국인들과 섞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내일은 또 어떤 일이 있을까?
덧붙이는 글 아이를 헝그리(Hungry)하게 키우지 못한 50대 학부모입니다. 삶의 목표를 잡지 못해 표류하는 아이와, 은퇴 후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 지가 현실적인 문제가 된 저의 처지는 일응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지구 반대편 먼 이국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점점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문제와 베이비 부머들의 2막 인생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호주 #맬버른 #쉐프 #청년실업 #베이비부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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