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두고 언더우드 선교사는 “씨앗을 뿌리러 왔는데 열매를 거두기 바쁜 나라”라고 했다.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새들생명울배움터 경당
특히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왜 유독 평양이었을까.
양 목사는 1894년 청일 전쟁, 1904년 러일 전쟁 두 차례 전쟁의 격전지가 된 평양은 '생존'이 절대적 우선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군인들은 조선인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
그런데 당시 교회는 미국 성조기가 걸린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생존과 자기 이익을 위해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선교사들은 기존 신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회개를 촉구한 것이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양 목사는 초창기 한국 기독교가 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낸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초기 기독교는 기존 조선사회의 가치와 문화에 저항하며 신분을 떠나 상호 존중의 문화를 실천했고, 여성 교육에 앞장섰으며, 민족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등 시대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며 뭇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았다. 안중근, 우덕순, 장인환, 이재명 등 많은 독립투사들이 기독교인이었다.
한국에 기독교가 연착륙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있다. 태국,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권 국가에서 선교사들은 개신교 신자 1명 얻는데 10년이 걸릴 정도로 애를 먹었다. 유독 한국만이 열광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했다.
다른 식민 국가들은 서구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매국노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 한국은 같은 아시아 국가였던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이 충돌하지 않고 함께 갈 수 있었다고 양 목사는 설명했다.
또한 교회는 합법적으로 모임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민족 독립을 모색할 수 있는 외피가 되어 주어 의식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
미국 기독교에 배신감을 느끼다하지만 하루아침에 세워진 이 동양의 예루살렘은 곧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국 기독교의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를 양 목사는 한국 교회사만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았다.
1884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에 들어온 총 선교사 1529명 중 1059명이 미국 선교사였다. 그러나 1905년 미국과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과 일본의 조선 점령을 상호 묵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미국 선교사들의 입지는 제한됐다.
조선 백성의 편을 들어 일본에 맞서려 했던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됐고 조선 땅에 머물렀던 선교사들은 일체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거나 일본에 우호적이 되었다.
"한국 교회사에서 1907년이 중요합니다. 선교사들은 대부흥운동 기간에 조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면서 일본 사람들을 미워한 것, 일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까지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이걸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가 봤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수탈에 방패막이가 되어 주지 못할망정 정당화시켜 주고 있는 선교사들의 행태에 의식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그래서 1907년 결성된 민족운동그룹이 '신민회'예요. 1907년은 순수 종교운동그룹과 순수 민족운동그룹이 분리된 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