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권센터 방혜린 활동가
이희훈
"여성인 거 티 내지 마라.""쉽게 아프다고 말 하고 다니지 마라.""생리 너만 하냐. 유난 떨지 마라."자신이 차별을 겪었으면서도 혜린씨 역시 후배에게 차별을 대물림 했다. 여생도를 모아 집합을 하면 늘 세 가지를 강조했다. 여성을 드러내지 않아야 군복무 생활이 편할 거라는 그 나름의 조언이었다. 그 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여성인 게 문제가 아니었다. 남생도와 동등하게 훈련을 받으면서도 필요할 때에는 치우고 닦고 따르고 꽃처럼 피어 있어야 하는 것이 여생도의 몫이라면, 그건 틀린 거였다.
"입은 닫아라"군대는 꾸준히 일방적이었다. 2008년이었다. 국방부가 23권의 책을 군내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그 차단대책을 논의했던 때다.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책장의 책 몇 권이 보이지 않았다. 옷장 정리, 책장정리를 빈틈없이 했기에 책 몇 권이 비면 바로 티가 났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체게바라 평전>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항의할 수 없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때는 '입 닫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군대는 세월호 배지와 리본 그 어느 것도 달지 못하게 했다. 리본을 달면 '정치적 중립 위반'이 된다고 했다. 세월호 배지 모양과 비슷한 배지는 그 어떤 거라도 달 수 없었다. 지휘관은 "그런 거 달면 정치적 중립 위반, 군인 복무규율에 어긋나는 것 아시죠?"라 재차 강조했다.
불편하고 찜찜했지만, 실체를 몰랐다. 답을 찾은 건 4년의 사관학교 생활 후 해병대에 복무하면서부터다. 경상남도 진해에만 있다가 해병대에 복무하며 김포로 발령을 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서울을 오갈 수 있었다. 읽고 싶었고 알고 싶었다. 무엇보다 누군가 주입한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이 간절했다. 친구들과 시사 이슈를 갖고 토론하고 글 쓰는 모임을 만들었다. 주말이면 친구들을 만나 열심히 나누고 썼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인가, 경제적 M&A인가', '제주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 주제는 다양했다. 생각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었다. 사관생도 시절, 제주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논문을 썼다. 대외무역 의존도가 높은 상태에서 해로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중국의 팽창을 견제할 해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했다. 논문공모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평화는 낯설고 국익은 중요한 시절이었다. 제주도 행군을 갔을 때, 강정마을 사람들이 쫓아온 적이 있었다. 해군사관생도들의 '해양정화활동'이었을 뿐인데, 마을 사람들이 군인을 보고 긴장한 것이다. 사관생도 몇몇이 마을 사람들이 쓰레기인지 돌인지를 던졌다며 투덜거렸다. 이게 이렇게 반대할 일인가, 참 이상했다. 국익이 중요한 건데, 왜 이렇게까지 반대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는데 그 단어가 참 낯설었다.
2년이 지나서야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국익은 무엇인가,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는 공동체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가. 안보란 무엇인가, 누구를 위한 안보인가를 고민했다. 덩달아 사관학교에서 찜찜했던 일들의 실마리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