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실 이주민 인권활동가가 8월 30일 서울 영등포 문래동에 있는 이주민문화예술공간 프리포트에서 이주민 다큐영화 상영회를 마치고 영화에 설명을 하고 있다.
이희훈
다시 그의 삶으로 돌아가 보자. 정혜실씨와 남편은 결혼 후 사업을 시작했다. 이주노동자에게 팔기 위한 식품을 수입하는 일이었다. 1997년 이주노동자가 많던 구로공단(현 가산디지털단지)에 무슬림(이슬람교인)을 위한 할랄 푸드 가게를 세웠다.
"처음에 향신료를 많이 수입했는데, 관세청의 수출입 품목분류코드인 HS코드에 없는 게 많았어요. 현재의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관세청 공무원들을 가르치다시피 했어요. 고수 씨앗으로 만든 코리엔더 파우더는 우리가 처음으로 수입했어요."정혜실씨 부부는 제법 돈을 벌었다. 이주노동자들이 경기도 안산으로 옮겨가자, 가게도 옮겼다.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레 그들이 처한 현실에 눈길이 갔다. 처음엔 사업이 먼저였다. 돈을 많이 번 다음에 돕자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난한 이주노동자에게 식품을 판 돈으로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채의식이 생겼다.
"이주노동자들이 한국말을 모르니까, 제가 전화를 많이 걸어줬어요. 임금을 체불한 사장에게 전화해서, 막 화를 냈어요. 그러면 '당신 누구냐'라고 하는데, '이 사람 누나다'라고 답해줬어요. 어음 수표를 받아온 이주노동자가 있어서, 사장한테 전화해서 '부도나면 끝 아니냐. 당신들은 사기꾼이냐'라고 말하기도 했죠."이주노동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2001년 혜실씨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문을 두드렸다.
"작은 것부터 돕고 싶었어요.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는 이주노동자의 인권침해문제를 상담해주고, 머물 곳 없는 이주노동자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곳이었어요. 먼저 부엌일부터 도왔어요. 주방에 가서 계란 프라이를 하고 설거지를 했죠."이후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의 모임인 파키스탄커플모임에서 활동했다. 다문화가족협회 대표, 터(TAW,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들) 네트워크 대표를 연달아 맡았다. 성차별에 대한 고민도 깊어, 대학원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했다. 그렇게 혜실씨는 인권활동가의 길을 걸었다.
"무언가를 깨고 균열을 내는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제가 그 역할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거죠.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하면, '계란이 되자'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바위는 안 깨지겠지만, 어떻게든 흔적은 남잖아요. 노른자가 붙어있든지. 하하.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을 했죠."차별과 편견파키스탄 남편과 결혼하고 이주민의 인권을 얘기하는 일은 한국사회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94년 파키스탄에서 결혼식을 하고 한국에 돌아온 날부터 차별과 편견을 경험했다. 당시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 남편은 입국심사대에서 다른 곳으로 불려갔다.
출입국 관리 공무원은 1시간 넘게 남편에게 왜 결혼했는지, 얼마를 가져왔는지 따위의 질문을 던졌다. 참다못한 혜실씨는 공무원에게 "내가 미국사람이랑 결혼해도 이렇게 했겠어요?"라고 물으며 울분을 터트렸다. "아니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허탈했다.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하면서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가족은 곧 남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국가는 쉽게 남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한국남성과 결혼한 이주여성은 바로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한국여성과 결혼한 이주남성은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똑같은 국제결혼인데 한국남성과 달리, 저는 제 남편에게 어떤 것도 줄 수 없었죠."혜실씨는 견고한 성과 인종 차별의 벽을 느꼈다. 그는 10년 뒤 다시 차별과 맞섰다. 2004년 주파키스탄 한국대사관 인터넷 게시판에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한국 여성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왔다. 정혜실씨를 비롯한 파키스탄커플모임 사람들이 댓글을 달면서 댓글 전쟁이 벌어졌다.
"그 사람들은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한 여자는 뭔가 모자라거나, 머리가 비었거나, 정신상태가 잘못됐다고 주장했어요. '어떤 여성은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했는데, 나중에 사기를 당했다더라', '이런 결혼은 문제가 있으니 막아야 한다'라는 얘기도 올라왔죠. 저희도 댓글을 달며 한판 붙었죠." 다시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세상은 좋아지긴 한 걸까.
"툭툭 다시 뒤로 가는 느낌 있잖아요? 한 열 발자국을 걸어왔는데, 갑자기 스무 발자국 뒤로 가는 느낌. 지난 10년의 정권에서 느꼈죠. 내 생애를 마감할 때까지 이주민 인권 활동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어요. 참 힘들겠죠? 하하." 재정 문제2009년 7월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는 버스에서 난데없이 "아랍인은 더럽다", "냄새 난다"와 같은 욕설을 들었다. 이후 법원은 가해자에게 모욕죄를 적용해 벌금 100만 원의 약식명령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많은 단체가 힘을 모았다. 정혜실씨도 여기에 참여해 연대활동에 앞장섰다. 그런 그에게 이주민방송(MWTV)이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는 얘기가 들렸다.
이후 그는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2016년부터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올해로 11회째인 이주민영화제의 사전행사인 수요밤마실과 같은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주민을 상대로 하는 콘텐츠 제작 교육에도 힘을 쓰고 있다.
"지금 콘텐츠에서 이주민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데 아직은 제한적이잖아요. 이주민들이 이주민방송에서 아나운서, 기자, 피디, 엔지니어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또한 우리가 만든 좋은 콘텐츠가, 한국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했으면 하고요."문제는 재정 상황이다.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 지원이 끊겼다. 지난 3월엔 재정적인 어려움이 정점에 달했다. 떠나는 직원의 퇴직금을 줄 수 없었고, 상근활동가에게 줄 월급도 모자랐다. 월세도 밀렸다. 고용노동부에서 고용보험을 내는 직원이 없으니 고용보험 사업장에서 제외하겠다는 연락을 하기도 했다.
혜실씨나 운영위원들이 운영비·인건비가 부족할 때마다 돈을 채워 넣었다. 그마저도 부족해, 후원의 밤을 열어 다른 단체에 손을 벌렸다. 당장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내년이다.
"지금 상근으로 있는 웹진 편집장 한 명에게 150만 원가량 월급을 주고 있고, 월세도 밀리지 않고 있어요. 다른 활동가들은 인건비를 지원받는 외부 프로젝트 덕분에 돈을 받으며 일하고 있어요. 근데 내년이 걱정이에요. 프로젝트도 끊기고 재정도 바닥나죠. 활동가들과 함께 일하고 싶은데, 걱정이에요."인권활동을 그만두고 싶다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