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명혼일도대명혼일도
김선흥
진왈라 여사는 이 지도가 1389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더욱 놀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양인이 그린 아프리카 지도보다 무려 100년 이상 앞선 게 아닌가. 여사는 여기에서 영감을 얻었습니다. 바로 민주 남아공 국민의 새로운 정체성을 위한 매체를 발견한 것입니다.
서양인이 그린 옛 아프리카 지도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침략과 착취, 식민지화와 노예의 기억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대명혼일도는 전혀 다른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아프리카인들이 다른 세계와 평등한 관계를 맺고 교류했던 역사의 증언으로 읽혔던 것입니다. 과거의 족쇄를 벗고 새로운 정체성을 탐색하고 있던 여사는 지도에서 길을 찾은 것입니다.
남아공 국회 천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지도 전시회를 열게 된 배경이 그렇습니다. 전시회에 대명혼일도를 소개하기 위하여 진왈라 여사는 중국 측과 외교적 교섭을 통해 복제품을 입수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그때 여사가 강리도를 또한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관련 기록입니다.
"(상세한 대명혼일도에는 오히려 나와 있지 않지만) 강리도에는 아프리카 남부 서쪽의 대서양으로 흘러가는 강까지 그려져 있다. 이는 오렌지강과 상응(correspond)한다. 대서양 쪽에 담겨있는 이러한 상세 지리 정보는 오로지 희망봉을 돌았던 사람들에게서 나왔을 수밖에 없다. (중략)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이러한 지리 지식은 정화의 항해보다도 앞선 것으로서, 강리도와 대명혼일도가 던지는 가장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남아공 국회가 강리도의 소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정부의 도움 덕분이었다. 고 오부치 총리(당시 전 총리)가 강리도 사본을 국회의장에게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출처: http://archive.li/5l9rD)
현재 남아공의 사이버 박물관(
www.pmpsa.gov.za)에 강리도의 두 판본과 대명혼일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강리도를 통해 남아공에 문화 친선 외교를 할 생각을 안 하는가(강리도 모사본이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 왜 우리나라에는 진왈라 국회의장 같은 인문지리학적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가 없는가(독일의 메르켈도 지도 외교를 종종 벌였는데, 2014년 시진핑에게 18세기 중국지도를 선물했다). 남아공과 일본이 우리의 강리도로 문화 외교를 벌일 때 왜 우리는 눈을 감고 있었으며 지금도 눈을 감고 있는가.
이런 의문을 뒤로 하고 이 기회에 대명혼일도에 대하여 좀 살펴 보겠습니다. 이 지도는 비단 바탕에 그린 것으로서 347cmx453cm의 대형 지도입니다. 강리도(150cmx163cm)의 6.4배의 크기입니다. 중국의 제일역사당안관(第一 歷史檔案館,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일본 교토대는 2006년 중국측의 협조를 얻어 원본 크기의 복사본을 입수하여 연구 중이라 합니다(교토대 미야 노리코). 지도 전체에서 보이는 하얀 눈송이 같은 것은 청나라 시절에 각각의 지명에 만주어 지명을 붙여 놓은 비단 메모 쪽지입니다.
대명혼일도와 강리도가 담고 있는 세부 지리정보는 동일하지 않지만 얼른 보아도 세계상의 구도는 동일합니다. 단지 대명혼일도는 동쪽의 한반도가 강리도에 비해 엉성하고 결함이 많으며 서단의 아프리카도 왼쪽이 잘려 나간 모습입니다. 전체적으로 강리도가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명혼일도에서 인도는 강리도의 그것보다 식별이 용이하나 만리장성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형상과 중앙의 거대 호수 및 나일강의 모습은 두 지도가 유사합니다. 단지 대명혼일도의 아프리카 남부에서는 오렌지강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