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치는 '이야기' 통하는 구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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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그렇다. 기초가 중요하다. 정치에서 기초는 지역이다. 내가 사는 곳, 내가 활동하는 곳, 내가 일하는 곳에서 정치를 만날 수 없다면, 그것은 허약한 토대에 마련된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정치'라 하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이를 구체적인 단어로 바꾸면 '정당'이다. 지역에서, 일터에서 '정당'을 만날 수 없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뿌리 없는 민주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민주노동당에는 '분회'라는 것이 있었다. 시·군·구 단위로 지역위원회가 있는데, 분회는 그보다 작은 규모의 마을 단위로 구성된다. 지역뿐 아니라 사업장에도 직장분회가 있었고, 대학 별로 만들어진 학생위원회도 분회 역할을 했다. 20~50명 정도의 당원들이 분회별로 월 1회 이상 모임을 진행했다.
분회는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였다. 분회 모임은 딱딱한 회의와 달라 당원들이 평소에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동네에서 발생한 문제도 공통의 이해관계로 다룰 수 있었고, 지역문제를 당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당원 실천의 날'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당 활동을 알리는 선전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분회를 통한 홍보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에게 지속적으로 당을 알릴 수 있다는 게 최대 장점이었다.
이처럼 분회는 당원 의견 수렴과 지역정치활동의 기초 단위이자, 중앙당의 소식을 전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의 다수는 노동자, 농민이었고, 인터넷 사용이 일상적이지 않았다. 분회모임을 통한 전달은 속도는 느리지만 정확했다. 당원들의 의견을 바로 들을 수 있었고, 서로 간에 토론이 가능했으며 그 과정에서 '당'에 대한 소속감과 일체감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분회장은 당원들의 의견을 지역위원회를 통하여 중앙당으로 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었다. 대의원들도 분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대의원 대회에 참석했다. 중앙과 지역 사이에 민주적 소통이 보장됐다.
'진보의 성지'로 불렸던 경남 창원의 경우 무려 16개 지회, 82개 분회가 있었다. 창원시당-본부(도의원 선거구)-지회(시의원 선거구)-분회 구조였다. '창원에서는 세 사람만 모이면 분회를 만든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창원시을지구당 사무국장이 작성한 <분회건설 방법론과 운영안>에 따르면 "분회 지역 사업과 후보 추천 등 선거구 단위로 진행되어야 할 사업은 지회가 담당하고, 일상적인 교류와 당원 관리는 분회에서 담당하는 구조로 사업을 진행하였다"라고 한다. 그는 '이런 구조를 통해서 당이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을 분회활동의 성과로 꼽았다.
물론 모든 분회가 활동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3분의 1은 모임조차 어려웠고, 3분의 1은 정기적으로 모임이 이뤄졌으나 지역 활동까지는 어려웠고, 나머지 3분의 1이 당 이름으로 안정적인 지역 활동을 했다. 지역별로 편차가 컸고, '동네' 정치의 어려움으로 인해 분회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분명한 것은 당시에는 '지역'을 중심으로 기초가 튼튼한 정당을 만들어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후 민주노동당의 내분으로 지역 기반이 무너지면서 분회도 사라졌지만 생각할수록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유럽 의회에 20대 의원, 30대 장관이 있는 까닭우리의 지방선거 투표율은 그리 높지 않다. 첫 지방선거 때 68.4%를 기록한 이래 3회 선거 때는 48.8%까지 낮아졌다가 지난 6회 선거에서는 56.8%로 증가했다. 한편, 19대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77.2%, 20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58.0%였다. 정치권은 지방선거 투표율이 대통령 선거나 총선보다 낮은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총선도 높은 편은 아니다).
언론은 중앙 정치(유력 정치인)를 주목하지만 시민들 곁에 더 가까이 있어야 하는 건 지방의원,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다. 그런데 국회의원은 알아도 시의원·구의원은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현역도 모를 진데 후보자들의 면면까지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선거 때마다 아쉬운 것은, '준비된 정치인'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많은데 얼마나 준비가 돼 있는지는 의문이다. '당선'을 위한 활동만 보이지 당선 이후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후자가 더 중요한데 말이다.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당 안에서 '시간이 걸려'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유럽에서는 신인 정치인이 외부영입이나 전략공천(우선공천)을 통해 정치에 입문하는 방식은 찾기 어렵다. 스웨덴의 경우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정당이 청년조직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정치인 충원의 통로가 된다고 한다. 청년조직에 속한 이들은 청소년기부터 일찌감치 각 정당마다 있는 정치학교에서 정치수업을 받는다. 교육과정을 마치고 나면 정치제도는 물론, 경제, 사회복지, 환경, 국제문제에 이르기까지 전문가에 준하는 지식을 갖추게 된다. 정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정당 안에서 교육 받는 것이다.
이런 청년들이 지방의회에서부터 시작해 국회의원도 되고, 장관도 되고, 총리도 된다. 그래서 유럽 각국 의회에서는 20대 의원, 30대 장관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준비된 정치인은 이처럼 정당 내에서 교육·훈련을 받고, 지역에서부터 정치인으로 성장한 사람을 말한다. 참고로, 스웨덴은 역대 선거에서 투표율이 80%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갑자기 '정치'를 잘하게 되는 경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