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10일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여사가 오늘 소천했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그간 노환으로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아 왔다. 1922년 태어난 이 여사는 대표적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다 1962년 고 김 전 대통령과 결혼해 정치적 동지로서 격변의 현대사를 함께했다. 사진은 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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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뒤 두 사람은 면우회(勉友會)라는 스터디 모임에서 또 한 번 부딪혔다. 면우회는 서울 지역 대학생 클럽인 면학동지회가 피난지 부산에서 새롭게 태어난 모임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고등여학교와 이화여전을 졸업한 이희호는 1946년(24세)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해 1950년(28세) 5월 졸업했다. 이희호는 면우회의 정식 회원이었다.
반면, 김대중은 정식 회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난 중에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모임에 들어갔다. 위 자서전 제1권에서 김대중은 그 시절 자신이 "배움에 허기진 젊은이"였다고 회고했다. 전쟁통에도 공부를 생각하는 특별한 사업가였던 것이다.
김대중은 "면우회에서 나는 이희호라는 여성을 만났다"면서 "김정례씨 소개로 여자청년단 회식 자리에서 잠깐 인사를 나눴고 면우회에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희호'라는' 여성을 만났다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대중은 이희호와의 만남이 면우회 때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전에 만난 적이 있음을 기억하면서도, 면우회 때 만남을 좀 더 강렬히 기억했던 것이다. 김대중은 "이상하리만치 이야기가 잘 통했다"고 술회했다.
"시국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는데, 특히 정치 얘기를 많이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구집권 획책 등에 함께 분개하기도 했다. 그녀는 의견이 분명했고 생각이 깊었다. 나라와 개인 사정이 좋아지면 외국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차면서도 따뜻했다."
이희호 역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희호가 본 김대중은 눈이 크고 핸섬한 멋쟁이였다. 또 책을 많이 읽고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였다"고 <이희호 평전>은 말한다.
두 사람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 같은 사이였다. 김대중이 자기 가족을 소개할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이희호 평전>은 이렇게 말한다.
"모임이 열린 광복동 다방에 김대중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다.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아내를 소개했다. 이희호의 기억 속에 남은 차용애는 '첫눈에 반해 결혼했다는 소문이 빈말이 아니었구나' 하고 느낄 만큼 매력 있는 여성이었다."
여성운동가가 된 이희호, 연이은 불운을 겪은 김대중
피난지 부산에서 스터디 모임을 여러 차례 가진 뒤, 이희호와 김대중의 연락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그 사이 두 사람 인생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이희호는 4년간의 미국 유학 끝에 1958년(36세) 스캐릿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이화여대 강사와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했고, 김대중은 정치에 뛰어든 뒤 연이은 총선 실패로 가세가 기울더니 1959년에는 아내를 상실하는 비애까지 겪었다.
이 시기 김대중은 끝을 모르는 불운에 계속 시달렸다. 사업과 달리, 정치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1954년(30세) 총선 때는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58년(34세) 총선 때는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으로 출마했지만, 자유당의 방해로 입후보 등록이 무효가 되고 말았다.
인제 선거구의 부정선거가 대법원 판결로 드러나 1959년에 열린 재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이번에도 노골적인 부정선거 때문에 낙선을 피할 수 없었다. 군인 표가 많은 그곳에서, 일선 중대장들이 투표함을 깔고 앉은 채 자유당 후보를 찍은 표만 투표함에 넣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을 찍은 표는 투표함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편 김대중의 실패와 파산에다가 자신의 건강 악화마저 겹친 상태에서, 생활비를 벌고자 미용실을 하던 차용애는 32세 되던 이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60년(36세) 4월혁명은 김대중 인생에 전환점이 되는 듯했다. 그해 9월 민주당 대변인이 된 데 이어, 이듬해 5월 13일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3일 뒤 그의 인생은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갔다.
5·16 쿠데타가 벌어져 국회의원 취임선서도 못했을 뿐 아니라, 졸지에 '구시대 정치인'으로 몰려 경찰서에 한동안 감금되기도 했다. 이희호가 여성운동가로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던 이 시기에 김대중은 정치무대에서 연이은 불운에 고통을 겪고 있었다.
부산에서 스터디를 함께한 뒤 소식이 끊어졌던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뒤 우연히 길에서 부딪혔다. 1959년 서울 종로에서였다. 소식은 그 후 다시 끊어졌다.
4월혁명 뒤 이희호는 김대중 소식을 신문에서 자주 접했다. 김대중이 당 대변인이 됐기 때문이다. 1961년에는 그가 보궐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과 부인을 2년 전 사별했다는 소식을 신문 기사에서 접했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의 만남을 촉진하는 기운이 있었다. 김대중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기운이었다. 5·16 쿠데타 후로 그는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무척 힘들었다. 생활비가 없어 후배의 대학 등록금을 빌려 쓴 적이 있을 정도다. 호주머니에 버스비가 없을 때도 있었다.
하는 일마다 죄다 꼬이고 희망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던 김대중은 정신적으로 의지할 데를 찾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다. 그런 기운이 마음속을 뚫고 나와 그를 움직였다. 그래서 찾아간 사람이 2년 전 길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이희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