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영화 박열 포스터 (우)영화 박열 속 후세 다쓰지 변호사.
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1925년 7월에는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변호를 맡았다. 후세 변호사는 1945년 12월 7일 박열의 출옥환영회 때(출옥일은 10월 27일), 옥사한 가네코에게 헌시(추모시)를 받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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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는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의 변호를 위해 조선(경성)으로 넘어간다. 연구자 가와구치 쇼코(川口祥子)씨의 논문 '布施辰治と朝鮮共産党実験(후세 다쓰지와 조선공산당사건)' <東アジア研究(동아시아연구)> 제58호(2003)에 의하면, 그는 변호사 자격이 박탈당하기 전까지, 그가 조선인을 위해 변호한 사건만 크게 15건(1911~1932)에 달한다고 하였다.
"나는 양심을 믿는다"
1932년 그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유는 법정 모독이었다. 1933년 후세 변호사는 신문지법·우편법 위반으로 3개월 실형을 언도받는다. 그리고 출옥하자마자 또다시 검거사건에 연루된다. 치안유지법관련 재판에서 격렬한 변호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검거된 동료 변호사 중 그는 홀로 법정투쟁을 지속하였고, 1935년에 석방된다. 그 이후에도 그는 활발히 약자의 편에서 끊임없는 변호 활동을 하였고, 결국 1939년에 변호사 자격을 말소당한다. 그리고 징역 2년의 실형을 언도받는다.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변호사 자격을 다시 돌려받은 그는 평화헌법의 보급과 계몽에 힘쓰며,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다. 1953년 그는 만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는데, 장례식에 수많은 조선인이 고별식 장의위원으로 참가하였다.
경이로운 그의 생애와 업적은 이규수 교수의 논문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한국 언론의 보도를 중심으로'(윤봉길 의사 순국 85주년 한·일 공동학술회의-윤봉길 의거와 세계평화운동)에 [부표]로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끊임없는 풍파 속에 그의 마음도 흔들렸을 터. 후세 변호사는 그때마다 자신을 다독이며 글을 적었고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일본의 시인(詩人)이자 농민운동가인 시부야 데이스케(渋谷定輔, 1905~1989)는 후세 변호사를 법률을 시화(詩化)시킨 법조인으로 평가하였다.
연약하지만 옳은 자들을 위해 나를 강하게 만들리라. 나는 양심을 믿는다. 弱いが正しい者のために私を強く作りなさい。私は良心を信じる。-변호사 후세 다쓰지 / 국문변역 김보예
그의 현창비를 찾아
약자를 위해 양심을 선택한 후세 변호사는 현재 어디에 잠들어 계실까? 그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여행 스팟인 이케부쿠로에 잠들어 계신다.
이케부쿠로역 남쪽 출구로부터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한 상재사(죠카이지, 常在寺)에는, 후세 변호사의 현창비(顕彰碑)가 건립되어 있다. 나는 헌화할 한 송이 꽃을 들고 상재사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