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위안스카이임오군란의 배후로 지목된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4년간 중국 톈진과 바오딩 등지에서 유폐생활을 하게 된다.
인터넷 百度
군제개혁으로 많은 군인이 일자리를 잃었으며 일본인 교관이 지휘하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만 우대하여 군인들의 불만이 쌓였다. 불만을 달래기 위해 정부는 밀린 급료 중 한 달 치를 지급했는데, 그 양이 모자랐을 뿐 아니라 쌀겨와 모래가 절반이나 섞여 있었다. 마침내 군인들이 봉기하였다. 군인들은 민씨 일파와 개화파 관료들을 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 호리모트 레이조 등을 처단했다.
군인들은 창덕궁으로 몰려가 이최응ㆍ민겸호 등 대신들을 죽이고 명성황후를 찾았으나, 궁녀로 변장하고 도망쳤다. 사태를 수습하던 대원군은 별기군의 폐지와 군인들의 급료지급을 약속했다.
한편 민씨 일파는 청국에 군대파견을 요청했고 4천여 명의 청군이 들어와 대원군을 반란 배후로 몰아 청국으로 납치하고, 대원군 세력을 제거하였다. 청군을 빌려 봉기를 진압한 민씨 정권은 이후 더욱 자주성을 잃게 되었다. 임오병란 때 본국으로 도망쳤던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소모토는 1,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에 들어와 배상금과 군대주둔권을 요구하고, 결국 강압적인 제물포조약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