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김하종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한국전쟁유족회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직원이 모시고 온 손님을 본 김하종은 "아이고 형님들, 오랜만입니다"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래, 잘 지냈는가?"라고 안부 인사를 하는 이는 사촌 형님 김하정이다. "형님요, 부산서 사업하는 일은 잘 되십니꺼?" "사업은 무슨... 쬐그만 장사 갖고서리. 남사시롭고." 김하정은 부산 초량시장에서 옹기장사를 하고 있는 터였다. 이어서 뒤에 서 있던 육촌형 김하원과 인사했다. 그와는 딱 11년 만의 만남이었다.
경주민간인 학살 이후
김하원은 1949년 8월 1일 이협우의 민보단이 경북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에서 김씨 일가족 22명을 학살한 '피의 제전' 때 간신히 살아남았다. 학살 현장에서 탈출한 그는 경주 영안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며 두문불출했다. 그런 김하원이 서울까지 발걸음을 했다.
"니는 집안 일가가 모두 학살되고, 심지어 자네 춘부장도 돌아가셨는디, 이 문제는 해결할 생각은 안 하꼬 뭐하는 놈이가!" 김하정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어서 김하원은 "니는 출세했다고,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으면 다고!"라고 다그쳤다. 두 집안 형님의 꾸중은 추상 같았다.
두 형의 꾸중을 들은 김하종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민보단은 경주군 내남면 바탕골에서 김씨 일가를 멸족시킨 후 4km 떨어진 홈실마을로 갔다. 그리고는 그 마을 민보단장 정규준에게 "어제 밤 바탕골에서 빨갱이에게 협조하는 자를 죽였으니 시체를 매장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상급 단체의 명을 받은 정규준은 홈실마을 주민들과 함께 현장으로 갔다.
같은 일가가 몰살 당한 사실을 모르고 이 대열에 합류한 김봉수는 현장에 도착하자 기겁했다. 사촌형과 형수를 포함한 집안 가족들이 마당과 부엌에서 피칠갑을 한 채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봉수는 시신들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감시자로 남아있던 민보단원이 눈을 부라렸다.
"장례를 치르려면 새 옷으로 갈아입혀야 할 거 아닙니까?"라는 김봉수의 말에 돌아온 것은 매질이었다. '빨갱이 시신 수습하는 데 무슨 격식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민보단원에게 매질을 당한 김봉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이웃의 지게에 실려 집에 온 그는 이미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아내 최일순은 남편을 살리려고 민간요법을 썼다. 그 요법이란 사람 똥을 구워서 먹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노력은 무용지물이었다. 김봉수는 집에 돌아온 지 9일 만인 1949년 8월 10일 세상을 하직했다. 김봉수는 서울에서 출세한 김하종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버지 김봉수가 민보단원의 매질에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인 1949년 8월 8일 밤 10시경 불청객이 바탕골에 왔다. 그는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에 누워있던 김하종에게 다가왔다. "네가 김하종이냐?" "네." "이리 와." 불청객은 김하종의 얼굴에 머리를 갖다 댔다.
"앞산에 우리 동지들인 산사람 80명이 3일째 굶고 있는데, 네 집 소를 갖고 가야겠다." "우리 소는 암새 나서 안됩니더."
그러자 불청객은 품안에서 권총을 꺼내며 "이 새끼 죽인다"고 협박했다. 17세 소년 김하종은 자신의 소가 발정나서 다른 사람이 소를 다룰 수 없다고 한 것인데, 불청객은 대뜸 총을 들이댄 것이다. 그때 바탕골 민보단장 정규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단장님, 그 아는 바봅니다. 이 집 여자가 딸만 셋 놓고 아들 하나 낳은 것이 바봅니다. 내려가시쇼." 정규준의 변명에 불청객은 권총을 집어 넣고 마을을 내려갔다.
불청객은 다름 아닌 내남면 민보단장 이협우였다. 그는 사경을 헤매고 있는 김봉수의 아들 김하종이 똑똑하다는 소문을 듣고, 화근을 없애기 위해 들이닥쳤다. 즉, 소를 순순히 내주면 빨갱이 협조자로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다. 아니, 응하지 않아도 죽이려 했다. 그때 정규준이 와 만류를 했기에 김하종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정규준이 돌아와 조금 전의 인물이 이협우임을 알려 주었다. 이틀 후 김봉수는 생을 달리했다. 김하종은 피눈물을 흘리며 언젠가 아버지와 집안 일가의 원수에게 복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럴 때 내남초등학교 류영태 선생이 김하종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니는 신사적 복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선생님요, 신사적 복수가 뭡니까?" "이협우가 면장이 되면 너는 군수가 되는 거다."
김하종은 류영태 선생의 말을 가슴에 간직하고 공부에 전념했다. 하루 세끼 연명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그는 내남중학교를 거쳐 경주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전교 2등으로 입학해 당시 입학금 6050원 중 4000원을 면제받아 2050원만 내면 되는데, 그 돈도 내지 못했다. 다행히 어찌어찌해서 경주고를 졸업한 그는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김하종은 법무부 형정국(지금의 교정국) 시험을 치렀다. 전국에서 합격한 24명 중에 2명만이 광화문에 있던 형정국에 배치되고, 나머지는 전국의 형무소나 지방검찰청에 배치되었다. 그런데 김하종은 광화문 형정국에 배치된 2인 중 하나였다. 말 그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이다.
그의 앞길은 출세가도였다. 1년여 근무하고 난 1960년 4.19 혁명이 발발했다. 혁명 직후 집안 형님인 김하정·김하원이 찾아와 그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김하종은 자신의 장밋빛 청사진을 내팽개쳐 버렸다. 17개월을 근무한 법무부 교정국에 사표를 내던졌다. 다음 날 경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4.19 혁명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