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한국전쟁유족회
최상희는 엄마 없는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열두 살에 당숙 집으로 일하러 갔다. 열두 살 최상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빨래, 설거지 등 식모 일이었다. 어느 해인가, 명절 때였다. 당숙모가 당신 자녀들에게는 골덴(코르덴의 비표준어) 옷을 해 입혔다. 당시에는 골덴이 한창 유행이었다.
그골 보고 최상희 가슴도 한껏 부풀었다. '나한테도 골덴 옷을 사주겠지'라는 생각이 망상이었음은 오래지 않아 확인되었다. 당숙모는 자기가 결혼할 때 입고 온 명주옷을 뜯어 최상희의 설빔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명주 옷도 귀했는데도 당시 최상희는 그게 그렇게 서운했다.
어느날 사촌고모가 찾아왔다. "고모, 나 양남(면)에 갈라요." "와?" "여기 있기 싫어요." "그럼 가자." 당숙 집에서 식모 일을 하는 게 편치가 않았던 최상희가 도로 양남면 집골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곳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마을 처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말이 있었다. "부산 가면 엄청 좋다카더라."
그렇게 해서 최상희도 부산에 갈 결심을 했다. 같은 마을 출신으로 부산에서 식모 생활을 하던 친구가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삼화고무' 공장에 소개시켜 주었다. 당시 최상희는 16세였는데, 기숙사까지 갖춘 공장이 마냥 신기했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최상희는 얼마 가지 않아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고무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화학약품 냄새는 참기 어려웠다. 코가 허는 것 같았고 만성두통에 시달렸다. 결국 오래지 않아 공장 생활을 접고 어느 집에 식모 겸 노동자로 취업했다.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이었다.
집장만 위해 몸이 부서져라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 울고 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 / 돌아서면 그리워라 범띠 가시내 /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 사내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김준식은 그해 내내 <범띠 가시내>라는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1970년 지명길 작사, 정민섭 작곡의 <범띠 가시내>는 가수 양미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 노래는 그해 윤정희, 이대엽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김준식은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범띠 가시내'를 부르며 다니다가 진짜 '범띠 가시내' 최상희(1950년생)를 만났다. 둘은 7살 차이였는데, 첫 눈에 서로 반해 불꽃같은 연애 생활을 거쳐 살림을 합쳤다.
최상희의 남편 김준식은 고속버스 운전기사였다. '삼화여객'이라는 시내버스에 입사한 후 시외버스를 거쳐 동부그룹에서 운영하는 고속버스를 했다. 이후 부산·경남이 근거지인 '천일고속'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하다가 범띠 가시내 최상희를 만났다.
둘 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뿐이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다. 남편이 천일고속에 출근하면 최상희는 마을에서 연탄을 배달했다. 트럭은 물론이고 그 흔한 리어커도 없었다. 빨래판에 연탄 6장을 이고 산비탈 꼭대기 집에 배달했다. 당시 부산 서구 안남동은 송도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비탈마을이었다.
연탄 한 장 값이 15원이던 시절, 여섯 장을 배달하면 6원의 이문이 생겼다. 하루에 5~6번 배달하면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국 하루에 30원가량 수입이 생겼다. 한 달 꼬박해야 1천원이 안 되는 돈이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일했다. 당시 남편 월급이 4만5000원이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하품 나는 돈이지만 그녀는 자기 집을 장만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