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식의 학살사유(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박만순
최해윤(당시 30대 후반)은 전직 경찰로 덕망이 높았고, 마을에서는 유지였다. 최씨 집 가장 세 명은 일가인 최해윤에게 자신들의 자식이 연행된 사유와 해결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각자 논 3두락(약 600평)씩 준비하세요. 해결 방법은 돈밖에 없어요." 그때부터 최씨 집안사람들 발바닥에는 불이 났다.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이나 조금이라도 끈이 있는 친인척 집 대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 누가 논 600평 값을 빌려 주겠는가. 결국 아무도 돈을 장만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남지서 유치장에 3일간 구금된 후인 1949년 7월 6일 오후 8시경 최윤식, 최영조, 최영득은 경찰과 민보단원들에 의해 내남면 용장리 뒷산에 끌려가 학살되었다(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어이없이 죽은 형님 최윤식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촉발된 시월항쟁은 미군정 당국의 양곡수집정책, 경찰의 부패, 미군정에 대한 반감, 한국인 군정관리의 무능함, 실업문제, 시민과 경찰 간의 악감정이 그 원인이었다. 항쟁은 대구를 시발로 전국에 확산되었는데, 경주에서도 항쟁의 불길이 일었다.
당시 시월항쟁으로 인한 경주군 피해는 상해 인원 총 56명, 가옥 전소 5채, 가옥전파 8채, 가산소각 14세대 등으로 총 피해액은 4847만원이었다. 이 중 내남면 피해액이 3700만원에 이를 정도로, 내남면은 경주 소재 면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저항과 보복이 있었다.
10월 3일 내남면사무소와 내남지서도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고, 최병윤 등 면민 300~400명이 면서기와 우익인사 집에 침입하여 가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또 10월 4일~5일 정운달 등 면민 300명은 독립촉성회에 소속된 면장 및 우익인사들을 협박·구타하였으며, 이들의 가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에서 재인용)
항쟁이 잦아들자 경주경찰서와 내남지서의 검거 광풍이 불었다. 주동자뿐만 아니라 집회 단순참가자도 검거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남면 이조리 최윤식(당시 만 17세)도 붙잡혀 대구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윤식은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 가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자 아버지 최영우의 '귀국하라'는 성화 편지를 받고 잠시 귀국했다가 발이 묶여버렸다. 그러다가 1946년 10월 내남면 소재지에서 일어난 10월 항쟁 집회와 관련해 검거되었다. 실형 3년을 언도받은 그는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49년 초에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최상춘(84세,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최영우의 삼남)의 증언에 의하면, 형 최윤식은 집회에 구경 갔다가 누군가의 사감으로 고발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시월항쟁 참여 사실 여부를 떠나 최윤식은 실정법으로 3년간 감옥살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즉, 합법적으로 자연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내남면 민보단 단장 이협우는 1949년 7월 3일 최윤식을 과거 10·1사건 관련자라며 무장한 민보단원들을 동원, 불법 연행했다. 하지만 최윤식과 같은 마을 사람 2명을 내남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금전을 요구한 것을 보면, 애초에 금전을 뺏기 위해 그들을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기의 목적인 금품 갈취에 실패하자 최윤식 일행을 학살했다.
독립운동가 학살한 친일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