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순이 작성한 부친 최명복의 사실확인서
박만순
"왜 지서에서 당신을 오라고 혀요?" "내도 모른다. 내캉 아무 죄도 없은께 뭔 일이 있겄노. 바로 올끼다."
피난 가기 며칠 전 아내 김복례에게 이렇게 말한 최명복(당시 42세)은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내동지서로 갔다. 그는 지서에 잠시 들렀다가 논으로 갈 요량으로 밀짚모자를 쓰고 삽을 메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최명복은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집안 조카뻘 되는 이가 김복례 집을 찾아왔다. "어제 지서에 있던 아저씨가 동네 벼 창고에 갇히는 것을 봤는데, 아직 집에 오지 않았죠?" "예?" 가족들은 화들짝 놀랐다.
김복례가 남편 밥을 급하게 해 내남지서 앞 벼 창고에 갔을 때는 주민 수십 명이 웅성거리며 서 있었다. 모두 남편과 자식 안부가 걱정돼 온 사람들이었다. "시방 창고에 백여 명이 갇혀 있는데 밥도 주지 않는다 카더라." 그날부터 김복례와 셋째 딸 최춘생이 밥을 해 날랐다. 어느 날 돌려받은 도시락에 쪽지가 들어있었다. '난 아무 죄가 없다. 조만간 나갈 꺼다' 최명복의 쪽지를 받았지만 밖에 있는 가족들은 불안하기만 했다.
내동지서 벼창고에 같이 갇혀 있던 김하원에게 최명복이 넌지시 말했다.
"처남이 내보다 먼저 나갈 것 같은데, 나가거든 최갑돌을 만나라. 그 양반이 똑똑하니까 지서에 연통이 있을 꺼다. 그러면 내가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꺼구만."
최명복은 6촌 처남 김하원에게 신신당부했다. 다행이 김하원은 돈을 써 학살 하루 전 창고에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김하원이 최갑돌을 만나 부탁한 게 성과를 내기도 전에 비극이 터지고야 말았다.
김하원이 풀려난 다음 날인 8월 15일 벼 창고에 갇혀 있던 최명복과 보도연맹원들은 트럭에 실려 경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내남면 틈수골 인근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모두 학살되었다.
최명복의 넷째 딸 최경순(81세, 경북 경주시 성금동)은 "아버지는 당시 동네 이장 최○영이란 사람 때문에 죽었어요. 당시 최○영은 이장 일을 보면서 도둑질과 온갖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께서 조목조목 따지니까, 이장이 미워했어요"라며 이장의 해코지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다고 주장한다.
50년 만에 만난 생질
"외삼촌..." 잠시 뜸을 들이던 김하종은 "니 금자 아니노? 이기 얼마만이노!"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2018년 50년 만에 경주유족회 사무실에서 눈물의 상봉을 한 이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김하종이 "근디 니가 여기는 우짠 일이고?"라고 묻자, 최금자는 "아버지 일 관계로 왔심더"라며 다시 눈시울을 적셨다.
김하종은 '아차'하며 가슴을 쳤다. 69년 전 매형이 학살된 일이 그제야 생각났기 때문이다. 매형 최명복이 누구던가. 자신을 친자식처럼 아껴 주었던 큰누님 김복례의 남편이 아니던가!
김하종의 큰누님 김복례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동생 김하종을 친자식처럼 보살폈다. 김하종이 경주고등학교 1학년 때 영양실조에 걸려 고향에 간 적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복례는 누런 씨암탉을 잡아 왔다. 동생의 몸보신을 위해서였다. 몇 년 후 김하종이 다시 앓아누웠을 때도 지극정성을 다했다.
1960년 4.19혁명이 터지자 전국에 민주화요구가 봇물처럼 터졌다. 민간인학살 피해유족들도 들고 일어났다. 전국유족회에 이어 경주유족회가 1960년 9월 5일 결성되었다. 아버지 김봉수를 포함 일가 22명을 경주 민보단에 의해 목숨을 잃은 김하종이 경주유족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김하종은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 사건은 천천히 해결하자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건은 수사를 의뢰하지 않았다. 김하종이 1960년 6월 16일 경주군 내남면 유족 75명과 함께 경주 민보단장 이협우를 살인·방화·강도 혐의로 대구지검에 고소할 때도 자신의 일가 22명이 이협우 등에 의해 학살된 사건은 제외했다. '저 놈아는 회장 맡았다고 제 집안일부터 챙기네'라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김봉수 사건도 1960년도 당시에 제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매형 최명복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누님 김복례는 동생 김하종을 물심양면으로 살폈다. 경주유족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김하종은 이듬해인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군사재판에 '무기징역형'을 구형받았다. 동생 걱정에 잠 못 이루던 누나 김복례는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넷째 딸 최경순에게 "니 외삼촌 고생하니까 명주이불 갖다 줘라"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을 아껴 주었던 누나를 김하종은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생질녀 최금자는 김하종이 운영하던 불국사중학교의 학생이었는데, 최금자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50년이 지나 처음 만난 것이다. 경주유족회 회장을 맡아 무수히 많은 억울한 죽음을 진실규명하는 데 힘쓴 김하종이 정작 자기 가족의 죽음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은 역사의 비극이다.
[김순도의 피난길] 할머니와 어머니가 서로 빼앗으려 해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경북 경주군 강동면 유금리 내동에 살던 황보선분도 2녀1남의 자식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막내 김순도는 1950년 4월 23일생으로 백일이 갓 지난 아기였다. 두 딸 김윤자(7세), 김순자(4세)도 애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피난길 내내 고역이었다. 둘째 순자는 네 살밖에 되지 않아 혼자 걷기 힘들어 툭하면 엄마 황보선분과 떨어지기 일쑤였다. 고령의 시어머니는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상태였는데도 집안 장손 김순도가 어떻게 될까 안절부절못했다. 손녀들은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아이고, 우리 애기"하며 손자만 챙겼다.
그러다가 며느리 황보선분과 시어머니 사이에 애기 쟁탈전(?)이 벌어졌다. "야야! 내가 애기 업을끼구만" "어무이, 어무이는 혼자 몸도 건사 몬하면서 무슨 얘기를 업는다고 하이소." 고부간의 설전은 몸싸움(?)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막내 순도는 며느리의 차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