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의 표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주자학이 국교로 되어 있는 사회에서 그는 유(儒)ㆍ불(佛)ㆍ도(道)ㆍ무(巫), 그리고 천주교까지 수용하는 사상적인 폭이 넓은 당대의 보기 드문 자유인이었다. 연경(베이징)에서 천주교 서책을 가져오고 첫 신도가 되었다는 주장도 따른다. 그는 어디에도,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호방한 자유인이었다.
조선왕조 5백년을 통틀어 그렇게 다양한 철학과 사상을 신념과 지식으로 소화한 유일한 인물이 허균이다. 그가 만약 반역죄로 처형되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루소(Jean Jacques Rousseau, 1712~1778)에 필적하는 자유사상가가 되었을 지 모른다.
모든 반역아ㆍ아웃사이더가 그렇듯이 그 역시 명예와 포폄이 함께 따른다. 명문 출신의 수재이면서 유림(儒林)이 질겁을 한 방자한 이단자, 절제잃은 경박자, 고독한 불청객, 아첨가, 모략꾼, 성격 파탄을 일으킨 올빼미, 광인, 괴물, 패륜아, 반역을 꾀한 역적이라는것이 기득세력의 인식이고 모해였다. 다른 편으로는 다정다감하고 가식을 싫어하는 행동가, 성품이 호탕한 의협인, 혁명을 꿈꾼 개혁주의자, 진취적 자유사상가, 근대적인 시민정신의 구현자, 선구적인 휴머니스트라는 평가가 그렇다.
허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설 『홍길동전』을 한글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세종 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264년 만인 1607년에 순한글로 이 소설을 썼다. 훈민정음의 반포에도 불구하고 조정은 물론 모든 사대부들이 한자를 상용하던 때이다.
소설 『홍길동전』은 우리 국문학사에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허균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내기 어려운 도전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82년 만인 1689년 김만중이 한글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지었다. 16세 때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한 김만중도 당쟁에 휘말려 남해 섬에 위리안치되고 한글소설을 썼다.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을 쓰는 사람은 자기 나라의 말을 두고 남의 나라 말을 쓰는데 급급하니, 이는 곧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것과 같다"고 양반들의 한문 문학을 비판했다. 허균의 생각을 이은 것이다.
『홍길동전』은 첫 한글소설임과 더불어 의적소설로도 첫 자리를 차지한다. 의적(義賊)은 "자유ㆍ영웅적 행위ㆍ정의의 꿈이 함께하는 존재로 굴종의 시대에 허리를 펴고 살고 죽는 투사들이다"(장양수). 영국의 로빈 훗, 중국의 송강(松江), 조선의 홍길동과 임꺽정 등이 꼽힌다.
또 하나, 그는 한국 방외(方外) 인문학의 선구자이다. '방외인'은 문화의 중심권에서 벗어나 있는 아웃사이더를 일컫는다. 그렇다고 사림파문인(士林派文人)에 속하지도 않는, 권세보다 '민중구제'의 뜻을 가진 재야의 제3세력이다. 김시습ㆍ남효온ㆍ홍유손ㆍ정희량ㆍ권필ㆍ어우적ㆍ임제로 이어지고 허균도 여기에 속한다.
조선왕조는 봉건적 계급사회였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홉 가지의 신분계급이 있었다.
제1 종친(宗親, 임금의 친족)
제2 국구(國舅, 왕비의 친정아버지)
제3 부마(駙馬, 왕의 사위)
제4 양반(兩班, 동반ㆍ서반의 사대부 문벌의 상류 계급)
제5 중인(中人, 양반과 상인의 중간계급, 벼슬은 할 수 없으나 내의원ㆍ사역원은 가능)
제6 서얼(庶孼, 서자와 그 자손)
제7 서이(胥吏, 관아의 아전 등 하급관리)
제8 상민(常民, 농업ㆍ어업ㆍ상공업 종사자)
제9 천민(賤民, 천한 백성으로 노비ㆍ광대ㆍ무당ㆍ백정 등)
양반출신인 허균은 임진ㆍ정유재란 이후 조금씩 각성하기 시작한 백성들, 그 가운데 '원민(怨民)'인 서얼들과 어울리고 뜻을 모아 사회변혁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조선의 평민문학의 길을 열었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다.
소설 『홍길동전』은 흔히 집안에서 천대받은 주인공이 활빈당을 조직하여 의적활동을 하는 스토리로 인식되지만, 해외진출과 이상국가건설이라는 장대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허균의 철학과 이상이 그대로 담긴다.
그렇다고 허균이 순백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인간적 약점ㆍ허점이 많았고, 일탈된 행동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유교의 반도(叛徒)'란 말이 따랐다.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10년」의 기록에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들어차 있습니다"라고 극악무도한 인물로 기술한다.
허균은 광해군 10년(1618년) 8월 50세 되던 해, 모반죄로 능지처참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썩은 정치와 사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혁명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대부 출신이면서 불우한 처지의 서얼들과 어울려 거사 준비에 나섰다. 동지들을 모아 무술을 익히고 자금을 마련하는 등 은밀하게 혁명을 꾀했으나 결국 누설되어 실패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