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아(49) 서원택(49) 부부 20여년 전 사진
이경아씨
남편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같은 증상이어도 가까운 친척 하나는 7년 만에 득남했다. 그 사실이 어쩌면 막연한 위로와 희망이 됐는지 모른다. 모태신앙인 둘은 아이가 찾아와 주기를 기도하며 살았다. 몇 년이 지나도 기쁜 소식은 없었다. 포기라는 말이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간절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경아씨 부부에게 아이와 연관된 어떤 일상도 허투루 지나가지 않았다.
"유아세례를 받기 위해 목사님 앞에 예쁘게 차려입고 젖먹이 아이를 안고 서 있는 젊은 부부를 볼 때면 눈물 한 방울이 갑자기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속도로 뚝 하고 떨어져요. 다른 사람한테 당연한 일들이 저한테는 당연하지가 않은 그런 거에 대해 약간 화도 나고 슬프고 그렇더라고요."
교회 친한 사람들도 누가 임신했다는 말은 그녀를 피해서 조심스럽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눈물이 나도 닦을 수가 없어요. 옆에 앉은 남편이나 우리 엄마가 눈치챌까 봐 저절로 마를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그런데 그게 괴로워서 제가 기도를 드리는 거예요. 애가 있든 없든 저런 장면을 되게 담담하게 볼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해달라고요. 그게 어느새 응답이 되더군요. 그 뒤로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어요."
임신에 대한 희망을 꺾고 편안해진 일상이 흐르던 어느 날, 사회복지사인 사촌 언니의 소개로 입양기관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임신은 포기했지만 아이에 대한 미련까지 버려진 건 아니었다.
이경아씨가 앞장서서 남편을 이끌고 받은 교육이었다. 남편은 적극적으로 입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아직 없었다. 남편의 그런 태도를 보고 더 이상 진행하지 않았다.
두 번째 시도는 의외로 남편의 말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남편이 텔레비전에 한 출연자가 아이와 함께 노는 모습을 보고, '내게도 저런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경아씨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 말 진짜야?"
남편은 데려올 수만 있다면 진짜 그러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아이에 대한 마음을 감추고 살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마침 교회 고등부 교사를 함께 했던 동료 친구가 보육원 원장이었다.
2016년, 4살 지우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그녀 나이 마흔셋이었다.
보육원 원장은 자신이 비록 아동양육시설을 운영하는 입장이지만 아이들은 가정 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한다는 가치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육원 아이 중에 친권이 없는 아동은 어떻게든 입양을 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였다.
아이들 수에 따라 지자체의 재정 지원규모가 달라지는 보육원 운영구조 상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지우가 있던 보육원 원장은 그런 현실 속에서도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던 분이었다.
경아씨는 남편과 함께 매주 지우를 보기 위해 왕복 4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다. 허락된 한 시간을 보기 위해서였지만 거리에서 보낸 4시간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겨울 가운데 즈음에 지우와의 외박이 허락됐다. 처음에 1박 2일이 나중에 2박 3일로 그러다가 일주일이 허락될 때도 있었다. 함께 살을 부비고 지내다 시설에 내려 놓고 돌아설 때는 눈물이 쏟아졌다.
1년여 가정 체험은 시설이 온 세상이었던 지우에게, 아이가 주는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 경아씨 부부에게 서로가 모르는 세상을 건너는 다리였다.
하지만 다리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을 지우나 경아씨 부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제는 서로의 가슴에 깊은 사랑이 뿌리 내리고 있었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조차도 버거울 만큼 설레는 시간이었다.
어느 날 벌어진 일
문제가 터진 건 지우를 장기가정체험으로 집에서 오래 데리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지우가 집에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으로 갑자기 경아씨를 세게 때렸다. 처음에 심한 장난인줄 알았다. 하지만 그 폭력의 강도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눈물이 날만큼 아팠다. 몸엔 멍이 들고 혈관이 터졌다. 상처를 본 남편의 표정은 심각하게 변했다. 아이는 분명 여기 와서 행복한 게 분명한데 이런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우는 잘 놀다가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 행복이 짙어질수록 폭행도 강해졌다. 4년을 시설에 뒀다가 이제와서 저를 찾은 엄마아빠에 대한 원망 같기도 했다. 사회복지사인 사촌 언니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양가감정이라고 했다. '지금 너무 행복한데 왜 나를 시설에 버렸느냐'는 항의라고 했다. 행복한만큼 화가 나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이 경아씨에게는 더 큰 아픔이었다. 이 어린 아이 마음에 그렇게 큰 화가 숨어 있을 줄 상상조차 못 했다.
지우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슴에 숨겨졌던 아픔과 슬픔이 모두 쏟아져 나와야 했다. 지우는 새벽 4시에도 일어나 악을 쓰고 울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저를 껴안은 엄마를 저리 가라 소리를 질렀다. 가면 또 가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귀신들린 아이처럼 울었다.
그런 날엔 남편과 함께 몸부림 치는 아이를 껴안아 차에 태우고 정처없는 길을 달렸다. 지우는 운전하는 아빠를 때리고 말리는 경아씨를 또 때리면서 울었다. 아직 입양이 끝나지 않은 가정체험 기간이었다.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냐는 질문에 경아씨는 대답했다.
"처음 본 그날부터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냥 제가 다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 했어요. 나는 이미 제 엄마인데 엄마는 그러면 안되잖아요. 오히려 저는 아이가 그럴 수록 마음이 너무 아프기만 했어요. 이제 10킬로그램 조금 넘는 아이 속에 어떻게 저런 화나 아픔이 들어 있을 수 있는지 속상해서 미치겠는 거죠."
아이를 만나고 흑백 세상이, 컬러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