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4월 현재 국회 법사위에 계류중인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안 중. 2012년 현 입양특례법 시행 이후 법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입양전제위탁이 법적 제도로서의 위상을 목전에 두고 있다.
김지영
용기씨 부부가 입양재판이 완료되기 전에 시윤이를 데려올 수 있었던 건 입양전제위탁이라는 제도 덕분이다. 이 제도는 입양특례법 이후 입양재판 동안 위탁가정에서 지내는 아이를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예비입양부모들의 절박한 민원으로 탄생한 제도다.
말이 제도이지 사실은 법적 근거없는 정책적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입양특례법이 만들어낸 사각지대 중 하나였다. 영유아들이 대부분인 입양대상 아동에게 가장 절실한 건 제 삶에 딱 한번인 눈맞춤과 배를 뒤집는 신묘한 기술을 사랑 가득한 눈으로 지켜봐 줄 엄마 아빠다.
이 소중한 시기를 위탁가정 방문에 의한 불편한 면회로 보내는 건 아이나 부모에게는 너무 허망한 일이었다. 입양재판을 시작한 부모들은 아이와 함께 있기를 간절하게 원했고 정책당국은 그걸 들어주었다. 그래서 시작된 입양전제 위탁이었다.
이 제도는 현재 국회 상임위에 여야간 합의로 계류되어 있는 입양특례법 전부개정안에 담겨져 있다. 법이 상임위 문턱을 넘고 본회의를 통과하면 입양특례법 시행 후 11년 만에 드디어 법적 제도로 정착하게 된다.
첫 선을 본 지 4일 만에 입양전제위탁으로 집으로 데려온 때가 7월이었고 입양재판은 8월초에 시작되었다. 몇 달을 각오했던 재판은 4일 만에 싱겁게 입양을 허가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다. 시윤이는 용기씨 부부의 첫 아들로 입적되었다.
아이로 인해 바뀐 용기씨 부부의 삶
아이가 오면서 용기씨 부부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이를 원심력으로 삶이 돌아갔다. 생각도 행동도 아이에게 맞춰졌다. 아이가 행복한 모습이 부모 마음에 어떻게 형상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둘째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너무 자연스러운 발상이었다. 입양신청을 했다.
처음 만난 날 시윤이 동생 시언이는 생후 10일이었다. 집으로 데려온 날은 태어난 지 한 달에서 하루 이틀이 모자랐을 때였다. 아들이었다. 아들 밑에 딸을 두고 싶었지만 아들이어서 국내입양이 안된다는 말에 덜컥 마음이 움직였다.
시언이도 시윤이처럼 순조롭게 모든 절차가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다. 입양재판까지 무사히 마친 때가 시윤이가 오고 2년 뒤인 2016년 9월이었다. 시윤이도 시언이도 조용하고 착한 성격이다. 손도 많이 안 가고 이것저것 어지르지 않아 바지런 떨 일도 없었다. 이런 아이라면 셋도 거뜬할 것 같았다.
용기씨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마흔 언저리에 공무원에 도전한 건 아내인 수연씨 권유 때문이었다. 용기씨의 예의 그 과감한 도전은 이번에도 성공했다. 기술직 9급으로 시작하는 적은 월급이었지만 아내 수연씨의 바람대로 형편에 맞게 안정된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용기씨도 공무원 신분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맞벌이를 하면서 경제적 여유까지 생기니 이번에도 은근하게 자식욕심이 발동했다. 이번에는 딸 하나 키워보고 싶은 욕망이 솟아 올랐다. 시언이 입양하고 4년이 지난 2020년 1월이었다. 건강한 여자아이를 만나는 건 1년 혹은 2년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윤이가 일곱 살 시언이가 다섯 살이었다.
하염없는 기다림을 예상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뜻밖의 전화로 끝을 알렸다. 최소 1년을 생각했는데 반 년 만에 입양 가능한 아이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생후 15일 된 시온이를 처음 만난 날은 7월 20일이었다. 시윤이와 시언이처럼 시온이도 5일 만에 집으로 데려왔다. 앞선 오빠들처럼 시온이의 입양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줄 알았다. 처음 기관에서 입양을 거절 당했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안정된 직장에 집도 있고 가정경제도 넉넉해져 있었다. 시온이가 입양재판에서 기각될 사유는 현미경을 들이대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막내 딸 입양재판 앞두고 닥친 일
입양재판은 가정법원 판사의 재량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각 지방법원 판사들 고유의 특성이 입양계에 소문으로 떠돌았다. 어디에서는 까다롭고 어디에서는 수월하게 또 어디에서는 느리고 어디에서는 빠르게 진행된다는 얘기들이 정설로 돌아다녔다.
같은 조건인데 과정과 결과에 대한 지역별 편차가 존재했다. 입양재판에 대한 전문성이나 입양부모 적격심사 기준, 아동최우선의 이익을 기준으로 한 재판기일 등 입양특례법 시행 전 입양재판의 보편적 원칙에 대한 사전 준비 부족으로 인한 폐해였다.
가정법원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이혼재판의 와중에 한 두 건의 입양재판이 섞여서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전문성을 바랄 수도 없었다. 당시 용기씨 부부는 기왕에 입양전제위탁을 하게 된 시온이를 위해서도 빠른 입양재판을 원했고 소문을 들은 재판부로 입양허가 신청을 했다.
하지만 시윤이와 시언이에게는 없었던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법원도 입양재판을 해나가면서 보완해야 할 점을 하나씩 추가하는 걸로 받아들였다. 법원 조사관이 가정방문을 오고 판사를 처음 만나는 날 느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재판 기일이 늦어졌는데, 영문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정인이 사건'이 터졌다. 전국에서 진행되는 입양재판에 사건의 파장이 미쳤다. 용기씨 부부에게도 열 번의 부모교육을 더 받으라는 조정조치 명령이 판사로부터 내려졌다.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권고사항이라 해서 처음에는 거부했다. 이미 교육을 받았는데 정인이 사건이 났다고 교육을 더 받으라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인이 사건과 용기씨 입양재판과의 인과관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허가 결정 권한을 쥔 재판부의 권고였다. 권고가 아닌 명령이라 생각하고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반복되는 내용의 교육을 열 번을 더 받았다.
시온이는 그런 와중에도 무럭무럭 잘 자랐다. 집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었고 떠들썩하게 돌잔치도 치렀다. 아직 입양재판이 끝나지 않은 입양전제위탁 기간이었지만 누가 뭐래도 용기씨 부부의 막내딸이었다.
입양재판 재판부가 내린 기각... 충격에 빠지다
8월 1일 법원 사이트에 들어가 사건조회를 했다. 입양재판이 시작되고 거의 매일 아침 해오던 습관이었다. 그런데 그 날 거기 결정문이 떴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기각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눈물이 떨어지고 그쳐지지 않았다. 기각이라니. 1년을 딸로 키워 온 시온이를 데려간다는 말이었다. 모든 가족들이 충격에 빠졌다.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법부의 엄중한 명령이었다. 입양기관에서는 법원 결정에 따라 아이에게 다른 가정을 찾아주기 위한 절차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용기씨는 그럴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는 늘 무언가가 부족한 아빠인 것은 맞지만 일1년을 살을 맞대고 살아 온 시온이에 대한 사랑은 되돌려질 수 없었다. 시온이에게 두 오빠와 엄마·아빠와의 이별은 삶을 가르는 끔찍한 상처가 될 터였다. 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절차를 다해서라도 시온이를 지키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