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즈워스의 고향 윌리엄 워즈워스의 고향 그라스미어(Grasmere)와 호반에 핀 꽃. 사진 오른쪽 위 마을에 그가 살던 집이 있다.
LakeDistrictNationalPark
김윤식 교수 5주기의 종강사 흉내
가을의 이별은 더 오래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다. 패티 김의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도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가을 분위기를 탄 덕분에 더 히트를 쳤을 거다. 학교의 종강과 졸업식이 겨울이나 여름에 있는 것과 달리 MBC저널리즘스쿨은 가을에 끝난다. 종강은 지난달 26일 했지만 그동안 각종 과제는 물론 개인지도를 원하는 학생들이 보내온 글 등을 틈틈이 첨삭해서 되돌려주느라 진짜 종강은 어제서야 했다.
나는 마지막 수업에서 시의성이나 계절에 맞는 시나 가곡 또는 대중가요를 들려주면서 학생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덧붙이곤 한다. 시를 한 편 소개하는 수법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를 흉내 내는 거다. 그는 마지막 수업이 끝날 무렵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을 칠판에 적어 내려갔다.
한때 그토록 휘황했던 빛이
영영 내 눈에서 사라졌을지라도
들판의 빛남, 꽃의 영화로움의 한때를
송두리째 되돌릴 수 없다 해도
우리는 슬퍼 말지니라.
그 뒤에 남아 있는
힘을 찾을 수 있기에.
캠퍼스에 온통 사복형사와 전경들이 깔려 건물 안에도 마구 들어오던 시절, 그는 시를 낭송한 뒤 해설도 없이 교실을 나갔지만 여운은 오래 남았다. 그로부터 30년 뒤 영국 유학 시절, 대학 동기생 5명이 케임브리지 우리 집으로 와서 유럽 여행을 함께했다. '폭풍의 언덕' 등을 쓴 브론테 자매의 고향인 하워스의 황량한 들판과 워즈워스의 고향인 잉글랜드 북부 호수 지역도 거닐었는데, 한 여성 동기생이 '초원의 빛'을 읊조리며 학창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게 아닌가!
김윤식 교수가 작고한 날도 5년 전 가을이었는데, 오늘(25일)이 바로 기일이다. '초원의 빛'을 읊조리던 동기생도 바로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이 가을 동기생들을 제주 키아오라리조트로 초대했는데 그 동기생은 오지 못한다.
학문·예술·언론의 표절과 창작 사이
나의 종강사는 뒷부분으로 미루고, 고별강연의 내용을 조금 섞어서 표절과 조작의 폐해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얼마나 심각한지 말하고 싶다. 강연 주제는 '학문·예술·언론의 표절과 창작 사이'였는데, 학계·예술계·언론계 할 거 없이 만연한 '표절·조작공화국'의 실상을 인식하고, 글을 쓸 때 표절과 조작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는 수업이었다.
우리나라가 표절공화국이 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집단은 학자들이다. 2004년에는 권위 있는 학술지 <네이처>에 논문이 아니라 한국인 과학자들이 최소 8편의 논문을 표절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김병준 교육부총리는 표절을 막아야 할 책임자이면서도 논문 표절 사실이 밝혀져 사퇴하고 국민대로 복귀했다.
외국에서는 표절이 문제되면 대학에서도 정계에서도 당연히 추방되는데 우리나라는 대학과 정치판이 '도피처'다. 국민대는 IOC 위원이자 국회의원이던 문대성씨의 박사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지만 그는 새누리당을 탈당만 하고 무소속 의원이 됐다. 국민대는 김건희 여사 박사논문 표절 의혹과 관련해 이번 국정감사에도 불출석하는 꼼수를 부렸다.
교수들이 대학원생 논문에 기여한 바도 없이 자기 이름을 올리는 일도 관행처럼 반복된다. 교수들이 그 모양이니 우리나라 대학은 논문 표절과 관련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강의를 제대로 하는 곳이 드물다. 2001년에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석·박사과정에 입학했더니 첫 주에는 특별 강연들을 통해 저작권 보호와 표절방지책, 출처를 인용하는 글쓰기를 누누이 강조했다.
표절·조작이 출세의 수단, '사이비 능력주의' 부추겨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태 이후 2006년에는 과학계 원로들이 부정행위애 제동을 건다며 낸 책 <탐욕의 과학자들>이 <뉴욕타임스> 과학기자들이 쓴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을 84쪽이나 베꼈다고 <프레시안>이 보도했다. '표절하지 말자'며 표절을 한 것이다.
문화예술계도 유명한 소설가들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고 조용필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돌아와요 충무항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마감 시간에 쫓기는 언론계에서는 타사 사설을 베껴 쓰는 사건이 여러 번 발생했고, 사실관계를 조작해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짓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타사 단독보도를 출처를 밝히지 않고 베껴 쓰는 일은 일상이 됐다. 특히 법조기자단은 검찰이 한 기자에게 피의사실을 흘리면 일제히 보도해 피의사실 공표죄마저 거의 사문화했다.
표절과 조작은 학문과 예술의 발전을 저해할 뿐 아니라 언론의 신뢰를 떨어뜨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차단한다. 은행잔고 서류 등을 위조해 부를 쌓고 논문 표절로 학력을 위조한 사람이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세태를 보며 '보통 사람들'은 절망한다. 처벌도 안 하는 사례가 많아 위험 부담이 적으니 표절과 조작은 출세의 수단이 되고 '사이비 능력주의'를 부추긴다.
'표절 유혹' 피하고 창작 인정받으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