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번번이 싸웠다. 내가 뽑은 제목의 수만큼이나 그게 제목이 될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가 맞붙어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설전을 벌이곤 했다.
픽사베이
K 선배가 있었다. 그때는 회사에서 선배들이 부르기만 하면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간에 긴장지수가 급격히 치솟았다. 특히 K 선배가 부르면 뭔가 실수라도 한 건가 싶어 땀부터 났다.
제목을 정할 때도 그랬다. 내 딴에는 열심히 제목을 고심해서 보냈는데 선배가 '보시기에' 별로였을 때(아마도 저 위에서 언급한 그런 이유에서 였으리라) 대번에 이런 말이 들려왔다. "이 제목으로 얼마나 보겠니... 이런 거 말고 제목 다시 뽑아 봐."
그 순간부터 내 안에는 작은 폭풍우가 일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돛 하나가 전부인 뗏목. 이걸 타고 어떻게든 선배가 원하는 문장 앞으로 가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내 문장이 제목이 될 수 없는' 경우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번번이 싸웠다. 누구랑? 선배랑? 그건 전혀 아니고 나랑. 내가 뽑은 제목의 수만큼이나 그게 제목이 될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가 맞붙어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는 설전을 벌이곤 했다.
최종적으로 제목을 정하는 과정에서 "선배는 어떻게 이런 제목을 생각하지? 선배는 되는 게 왜 나는 안 되지?" 싶을 때는 아주 많았고, 가끔은 선배가 뽑은 제목이지만 내 마음에는 들지 않을 때도 있었다. 또는 나는 동의할 수 없는 제목이지만 '에라 모르겠다, 시키는 대로 하자'라고 넘어갈 때도 있었고.
해도 해도 선배 마음에 드는 제목이 안 나오면 대놓고 묻기도 했다. "그래서 선배, 어디 부분을 중심으로 제목을 뽑으면 좋을 것 같아요?" 범위라도 알려주면 덜 헤맬 것 같아서(엉엉). 봐야 할 기사는 많고 제목을 더 뽑을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선배의 주문까지 더해진 날엔 특히 더 그랬으리라.
그래도 쌓이는 시간만큼 제목도 점점 나아졌다. 양이 질을 높이는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자주, 오래, 많이 뛰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잘 뛰게 되는 이치다. 뛰다 보면 몸이 바뀐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쓴 하루키의 말처럼 뛰기 더 좋은 몸으로. 글도, 제목도 마찬가지.
10개씩, 5개씩 뽑아보라고 하던 제목이 어느 날엔 3개로 어느 날엔 2개로, 어느 날엔 하나만 더 뽑아봐라는 식으로 그 양이 줄어들었다. 가끔은 '좋다'는 말도 들었다. 또 어떤 날은 '기사에 비해 제목을 너무 잘 달았다'는 과한 칭찬도 들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가 선배가 되어서야 K 선배가 왜 그렇게 많은 제목을 요구하는지 알았지만, 아래 인용한 글을 그때 미리 봤다면 조금 덜 서러웠을 것 같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가, 하는 자책이 조금은 덜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자신이 만든 책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에게 알리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집어 들게끔 하는 글을 써내는 감각이었다. 그럴듯한 글. 편집자는 그러한 글을 써낼 줄 알아야 했다."
오경철 편집자의 책 <편집후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고개가 절로 끄덕끄덕. 편집자가 써내야 할 줄 아는 '그럴듯한 글(보도자료)'이 나에게는 제목이었다. 제목을 뽑는 일은 그럴듯한 문장을 써내는 감각을 기르는 일이었다. 내가 보는 글을 더 많은 독자들에게 알리고, 더 많은 독자가 클릭하게끔.
선배들이 몇 개씩 제목을 뽑아보라고 한 것도, 내가 후배에게 다시 제목을 뽑아보라고 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조사 하나, 단어 하나, 서술어 하나, 순서에 따라 미묘하게 맛이 달라지는 제목이기에, 가장 어울리는 문장을 찾기 위해서다. 많은 경우의 수에서 꼭 알맞은 제목이 나오기도 하니까.
내가 쓴 글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