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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병 얘기만 나오면 조용해지는 의사들, 왜냐면

[주장] 직업병 진단, 쉬워져야 하는 이유

등록 2024.06.11 10:36수정 2024.06.1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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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기. ⓒ pexels

 
'왜 의사 선생님들은 직업병이나 산재 얘기만 나오면 말을 아끼시는 건가요?'

직업병을 다루는 의사 입장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다. 의사들은 치료를 위해서는 '휴식이 필수적'이라고 마치 통일이나 한듯 얘기하면서, 산재 여부를 질문 받는 순간부터 태도가 소극적으로 변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의외로 대다수의 직업병은 병원에서 진단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직업병이 진단되지 않는 병원

​먼저 대다수의 직업병은 임상검사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직업병은 업무 수행과 연관된 될 때 인정되는 병이다. 영상 검사를 포함한 각종 임상 검사와 의사의 진찰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해당 질병의 존재 여부이지, 그 병의 발병과 특정 업무 수행 간의 인과성까지는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예컨대 병원에서 시행하는 영상 검사나 조직검사를 통해 폐암을 진단할 수는 있어도 폐암 발병이 각종 유해인자 노출 때문인지, 혹은 유해인자 노출이 얼마나 발병에 기여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매우 많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진료실에서 접하는 의사는 업무와 질병이 어느 수준으로 인과성을 갖춰야 직업병으로 말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직업병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질병이라는 특성을 가진다.

최근 근골격계 질환이나 과로사, 직업성 폐암 등이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이전보다 절대적 발생 건수가 높아져서라고 보긴 힘들다. 그간 질병의 원인을 일에서 찾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또 그 인과성의 인정 기준이나 그에 대한 입증의 엄격성이 상대적으로 완화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바꿔 말해, 직업병은 사회적 요구와 규정에 의해 진단 기준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0~11년의 의과대학 교육과 전공의 수련기간에 직업병 진단에 대한 통찰력을 키우기 위한 과정은 현재로선 사실상 전무하다.

그 결과 질병을 진단하는 의사로서도 발병 원인이 굉장히 엄격하게 확인될 수 있어야 직업병으로 분류될 수 있지 않느냐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상황이다. 바꿔 말해 특정 질병을 직업병이라 규정할 수 있으려면 그 개연성을 민사적 시각(51%)이나 심지어 형사적 시각(90%) 이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의사에게 주로 기대되는 역할은 진단과 치료이기 때문에 그 병의 원인을 철저하게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의사 개개인의 직업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일개 의사로서 병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권한이 따로 부여되어 있는 것도 아닐 뿐더러, 직업병과 일반 질병은 대개 예후나 치료 방법이 다르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에 심층 면담을 통해서 직업병 해당 여부를 파악할 동기 요인도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의사 자신의 소견 한 마디가 행정적·사회적으로 어떻게 해석될지 예측이 어려운 상황에서 자칫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갈등을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우려로 인해 우선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고 판단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렇듯, 직업병 자체의 특성 때문에나 구조적으로나 의사 개인의 역량 면에서나 나의 질병을 진단, 치료하는 의사가 직업병 해당 여부를 단언해줄 수 없는 상황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럼에도 왜 원활한 치유를 위해서는 휴식이 필수라고 말하는 것인가?

'공정'을 추구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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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 pexels

 
평소 의사로 부터 자주 듣게 되는 '병이 일 때문에 생겼다거나 쉬어야 나아진다'라는 표현은 곧 이것이 산재보험상 직업병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재보험으로 보장하는 직업병은 법적·행정적 개념의 성격이 강하고 의사의 표현은 원활한 치유와 양호한 예후를 위한 원칙적 표현에 가깝다.

그럼에도 현재 직업병을 신청하기 위해서는 산재 요양급여신청 소견서를 의사에게 발급받아 관계 기관에 제출하게 돼 있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매우 불합리한 절차로 볼 수 있다. 물론 일반진단서로도 신청이 가능하게끔 변경됐다지만 현재 대다수는 관행적으로 의사로부터 발급받은 산재 소견서를 요구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직업병의 개념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의사와 환자간의 갈등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불필요한 과정이며 이런 것이 규제개혁 대상이다.

요컨대, 병을 진단, 치료하는 의사로부터 '병의 임상적 진단 가능 여부'의 확인으로 충분할 뿐, 그 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이것이 산재보험으로 보장되는 경우에 해당하는 상황인 것인지 애초에 문의할 필요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굳이 먼저 불편하게 요구하지 않아도 내 병을 진단·치료해 주는 병원으로부터 산재보험에서 의미하는 직업병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 큰 꿈이라면, '특정 수준의 개연성을 갖췄다면 직업병에 해당한다' 같은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인도 누구나 직업병을 의심할 수 있고 대단한 결심이 필요 없이 직업병 해당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 체계를 고민해 볼 때이다. 이것이야말로 '공정'을 추구하는 산재보험의 시급한 과제라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박승권씨는 김용균재단 이사이자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산재진단 #의사 #직업병 #박승권 #김용균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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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6일 출범한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입니다. 비정규직없는 세상,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는 세상을 일구기 위하여 고 김용균노동자의 투쟁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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