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동의 졸업사진.
단국대학교
1950년대 초반 당시에 일자리를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특히 정진동이 대한신학교에 입학했던 1954년도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서울의 관공서가 폭격에 불타고 교통과, 공장, 시장 등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일자리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는 동대문에서부터 용산까지 걸으며 주변에 있는 공장과 회사들의 간판 이름과 주소를 메모했다. 일주일간 미친 듯이 걸어 다니며 메모하느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방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썼다.
"본인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경야독하기 위해 야간 신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소사(학교나 관공서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이)도 좋고 아니면 청소부, 화부라도 좋으니 일자리가 있으면 선처해 주십시오. 배움에 목말라 이렇게 애쓰는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22세의 청년 정진동은 애끓는 심정을 편지에 담아 길거리에 나섰다. 일주일간 다니며 공장과 회사, 상점의 주소를 적기는 했지만 우푯값이 없다 보니 자필로 쓴 편지를 공장과 상점 편지함에 꽂았다.
그러고는 매일 교회에 나가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해 일하는 상상을 하며 혼자 빙그레 웃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편지를 우편함에 꽂은 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아침부터 막노동판을 다녔다. 장작 패는 일터, 연탄 찍어내는 일, 사이다 박스 만드는 공장, 건축 현장 등 수십 곳을 다녔다. 거의 2개월간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용산 경찰서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동양제빙 공장 건설 현장을 발견했다. '또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십장(일꾼을 직접 감독하는 우두머리)을 만났다. "당신 막노동할 수 있어?" "예. 시키시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십장의 질문에 정진동이 답했다. "내일 아침 8시부터 나오라"는 희소식을 접했다.
어렵게 얻은 작업장에서 처음 시작된 일은 우물을 파고 높이가 150cm 되는 노깡(토관)을 땅 아래로 깊이 묻는 일이었다. 우물의 깊이는 12개의 노깡을 묻어야 했으니 18m였고, 직경은 4m였다.
정진동을 포함한 8명의 노동자가 동시에 우물에 들어가 흙을 팠다. 그런 후에 단계적으로 노깡을 묻었다. 그러다 우물 속의 발동기가 정전이 돼 노깡 옹벽에 전류가 흘렀다. 모두가 감전돼 죽을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넘겼다.
이어진 작업은 30m 높이의 물탱크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 이런 고된 작업으로 오후 5시 30분부터 하는 야간부 수업을 2시간 뒤늦게 들어갔다. 결국 친구들이 대리출석을 해줬고, 2시간 분량의 학습은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야 했다. 이러기를 3개월 하니 제빙공장 작업도 끝났다.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죽음과 맞바꿔
다시 일자리를 찾은 곳은 용산 삼각지에 있는 미군 부대였다. 처음에 유리 절단공을 모집해 무조건 응했는데, 사실은 정진동에게 그런 기술이 있을 리 만무였다. 그렇지만 무작정 손을 들었다. 정작 일을 시작하기로 한 날 현장에 가니 "취업 공고를 잘 못 냈다"며, 풀 깎는 노동자를 구한다고 했다. 정진동은 십년감수했다. 유리를 한 번도 절단해 보지 못한 그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풀 깎는 것은 시골에서 늘 해 왔던 일이기에 '누워서 떡 먹기'였다.
정진동을 포함해 12명이 한 조가 돼 1954년 6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풀 깎는 기계가 없던 당시는 미군 부대 주변에 자라나는 모든 풀을 낫으로 깎아냈다. 그런데 그는 일을 하면서 동료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미군 부대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 중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이 많았다. 기름종이, 유리, 송판, 베니어합판 등이 바로 그것. 미군 부대에 고용된 한국 노동자들은 이것을 주워다가 시내에서 팔아 돈을 챙겼다.
그런데 정진동은 양심상 이 일에 동참할 수 없었다. 마치 도적질하는 것 같아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불의(?)한 일에 연루되면 마치 자신이 지옥에 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만큼 순진하고 양심적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동료들로부터 눈총을 샀다.
대신 그는 식당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인근에 돼지 기르는 사람들에게 갖다 주웠다. 그러면 약간의 돈을 받았다. 사실 이 일도 양심에 찔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수업료 때문에 억지로 했다.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가 났다. 미군이 끌고 온 작은 트럭에 12명의 노동자들이 승차했을 때였다. 정진동은 운전자 옆 발판에 타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차가 급출발을 하면서 추락했다. 모두 정진동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미군이 정진동에게 3개월간 휴직을 줬다. 그 기간이 모두 유급 처리돼 그해 1년간의 수업료와 생활비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전동역 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