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죽교회호죽교회(좌)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우)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원 뚜 뜨리." "굿모닝." "예스."
학교 교실에 모인 친구들은 각자 영어를 구사하며 아침 인사를 했다. 굿모닝은 그렇다 쳐도 '예스'와 '원 뚜 뜨리'는 아침 인사와는 아무 관련성이 없는 단어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영어 단어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정진동으로부터 배운 영어를 원 없이 구사했다. 특히 "원(One) 뚜(Two), 뜨리(Three)"는 교장 겸 영어 교사인 정진동이 발음한 대로 따라 한 것이다. 발음이 틀리든 말든 까까머리 개구쟁이들은 영어로 인사를 나누고 '깔깔깔' 웃음을 뜨렸다.
정진동이 교실에 들어서자 반장이 "차려. 교장 선생님께 경례"라고 하자 학생 십여 명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정진동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아이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했다. 1960년 당시 충북 청원군 옥산면 호죽리 아이들에게는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낯선 이야기였다. 게다가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수군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에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는 영어를 가르쳤던 정진동이 그날은 왜 역사 교사가 됐을까? 당시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는 교장인 정진동이 영어 겸 윤리, 역사, 사회를 전부 가르쳤다.
사라진 '어른 흉내 내기'
가좌국민학교와 금계국민학교를 졸업한 호죽리와 인근 아이들은 희망이 없었다. 기껏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부모 따라 농사지을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뼈 빠지게 일해도 굶어 죽기 십상인 것을 부모의 삶을 통해 학습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일부 친구들이 검정 교복을 입고 인근 중학교로 등교하는 모습을 보면 한없이 부러웠다. 부러운 만큼 자괴심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던 차에 호죽교회 목사 정진동이 1960년 3월 기존 '중등성경구락부'를 '고등공민학교'로 개명해 교육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았다.
호죽리 피기성(당시 14세, 제1회 졸업생)과 친구들은 공민학교가 만들어진 이후 생활이 180도 바뀌었다. 이전까지는 10대 중반의 아이들이 술과 담배를 하며 어른 흉내 내기에 바빴다. 심지어 화투를 일삼기도 했다. 어른들이 혼쭐을 냈지만 뒤돌아선 아이들의 생활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호죽헌신고등공민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아이들의 '어른 흉내 내기'는 완전히 없어졌다.
1957년 대한신학교 4학년 시절부터 호죽교회 전도사를 맡은 정진동은 1958년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호죽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호죽교회는 1936년 강수복의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린 이래 1940년 충북노회 소속으로 설립 인가를 받았다.
정진동이 부임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고등공민학교의 설립이었다. 이는 청소년들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을 엿봤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설움과 한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낀 정진동은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더이상 없기를 바랐다. 목회자인 동시에 교육자, 휴머니스트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교수, 검찰수사관, 목사를 배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