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리재에서의 학살. 박건웅,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박건웅
"아부지 가지 마셔유"라는 아이의 말
"여기 도장 찍으면 비료를 공짜로 준댜~."
"가입 안 하면 품앗이도 없어유~."
땅만 파먹고 사는 이들에게 품앗이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도장을 찍지 않으면 품앗이를 안 한다니, 마을에서 내쫓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최규용 형제는 망설임 없이 도장을 찍었다. 더군다나 강릉최씨 집성촌인 문화리와 옆 마을 무릉리 사람 대부분이 도장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였다. 해방 후 전국에 불었던 농민회(전국농민총연맹) 가입 바람이 살미면에도 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서에 도장을 찍은 이들은 1949년도 국민보도연맹에 자동으로 가입하게 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 문서는 살생부가 됐다.
국민보도연맹원 모이라는 연락에 최규용 형제는 낮에 모내기를 해, 몸이 천근만근 이었지만 살미지서로 갔다. 전쟁 전에 국민보도연맹 소집에 응하지 않은 이들이 혼쭐이 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살미면 신매리 엽연초 사무실에서 모였던 국민보도연맹 모임에서는 반공 교육을 실시했다.
문화리 최규용 형제를 포함한 살미면 73명의 국민보도연맹원은 면 소재지인 세성리의 살미지서로 모였다. 그곳에서 트럭에 태워져 충주경찰서로 이송됐다. 유치장에 며칠 구금된 후 그들은 후퇴하는 국군 6사단 7연대 군인들과 충주경찰서 경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1950년 7월 5일이었다.
문화리 젊은이(국민보도연맹원)들의 떼죽음 사건에서 극소수 눈이 밝은(?) 이들은 죽음의 골짜기로 가지 않았다. 우양섭은 소집 당시 신매리 고개에서 몰래 대열을 이탈해 귀가했다. 마을 국민보도연맹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신정희는 아들의 "아부지. 가지 마셔유"라는 말에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천만다행으로 이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샌님 손 한 이는 매타작
사실 살미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전 월악산 빨치산이 무릉리와 신당리 청년을 학살한 것이 시초였다. 빨치산들은 대한청년단 살미면 단장 김순갑(무릉리)이 집에 없자 그의 형 김진갑을 쇠망치로 가격해 학살했다. 또한 독립촉성국민회 살미면 청년대장 윤숙일(신당리)도 같은 날 죽임을 당했다.
이들의 장례식은 신매리에 있던 살미국민학교에서 봉행됐다. 장례식이 열린 운동장은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문화리 소년 최조태도 갔을 정도니 말이다.
장례식을 치른 며칠 후 살미지서 순경들이 무릉리로 출동했다. 심OO의 집에 불을 질렀다. 빨치산 활동을 한다는 혐의였다. 경찰의 보복행위였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본격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살미면에 드리운 것은 국민보도연맹 사건 때부터이다.
전쟁이 난 그해, 여름 피난은 고난의 행군이었다. 최조태가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과 함께 피난 보따리 짐을 지고 괴산군으로 갔을 때였다. 최조태는 괴산군 장연면 광진리 진대마을에서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미군 폭격에 부상당한 문화리 청년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의 가족들은 남의 집 헛간에 부상자를 눕혀 놓고 물 한 양동이를 떠 놓고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환자 상태가 며칠 못 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일 후 피난민들이 돌아오는 길에 그곳을 지나치는 데 놀랍게도 그때까지 부상자가 살아 있었다. 가족들은 반가운 마음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담가에 싣고 문화리로 돌아왔지만 등에 큰 구멍이 난 환자는 오래지 않아 저세상 사람이 됐다.
피난길에서 돌아오니 북한군이 문화리 길가에서 행인의 손을 일일이 검사했다. 손에 굳은살이 있으면 무사통과였다. 그런데 굳은살이 아니고 샌님처럼 손이 희거나 고우면 옆 참나무밭으로 끌고 가 매타작을 했다. 공무원이거나 지식인일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