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엄마가 부르는 사모곡

엄마의 울음 소리에 내 가슴은 철썩 내려앉고

등록 2003.06.01 00:03수정 2007.06.18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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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울엄마 어디갔어. 엄마 보고 싶어. 엉엉엉."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울음은 웃음인지 울음이지 모를 독특한 소리 울림을 냈다. 마치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듯한 스산한 울음 소리는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엄마 왜 그래? 왜 우는데? 도대체 누구 엄마가 보고 싶다구..."

수화기에서 갑자기 흘러나오는 엄마의 울음에 너무나 놀라 소리 질러 물었지만 내 물음엔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엄마는 울기만 했다. 뜬금없이 엄마가 울며불며 하는 바람에 '보고 싶다는 엄마'가 혹시 다른 사람을 말하는지 잠시 헷갈리기까지 하였다.

"나 엄마가 보고싶어. 울엄마 어디갔어. 엄마가 자꾸 보고싶단말야"
"엄마 어디갔어. 울엄마 불러다 줘. 엉 엉 엉"

엄마가 말하는 그 '보고싶은 엄마'가 할머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난 코끝에 찡하니 전기가 나더니 이내 눈물이 났다. 엄마가 갑자기 할머니를 찾으며 우는 것이 혹시 돌아가시려 저리 하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나기도 하였다.


"엄마, 할머니 옛날에 돌아가셨잖아. 돌아가신 분을 어떻게 만나."
"엄마, 울지마, 뚝해야지. 뚝해. 울지마, 응?"
"나, 엄마 보고싶어, 울엄마 꼭 한번만 보고 싶단말야, 엉,엉,엉"

전화로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막무가내로 울기만 하던 엄마를 한참만에야 진정시키고 전화를 끊었지만 엄마는 그 이후부터 부쩍 할머니를 찾았다.


언니와 함께 있을때도 '엄마가 보고싶다'고 한참을 소리내어 울기도 하고 '엄마의 남자친구'인 아저씨가 놀러오셨을 때도 '엄마를 한번만 보고싶다'며 눈물을 한없이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낮잠을 주시무다가 "엄마, 엄마"하며 헛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밤에 깊은 잠을 주무시면서도 '엄마, 난, 안갈래. 싫어'라는 등의 잠꼬대도 하기 시작하였다. 또 어떤때는 한밤중에 자다 일어나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멍하니 앉아 '엄마가 보고싶다'고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엄마는 3남 2녀중 막내딸이었다.
제일 큰 외삼촌은 이미 돌아가셨고 포항에 살고 계시는 이모님이 둘째였다. 세째로 청년시절 행방불명 된 외삼촌이 있었고 넷째가 지금 강원도 양구에 살고 계시는 외삼촌이다. 5형제중 다섯째가 엄마인데 지금은 77세의 엄마와 80세의 강원도 외삼촌 83세의 포항이모 이렇게 삼형제만이 남았다.

막내딸로 집에서 얼마나 귀염을 받고 자랐던지 할머니(나에겐 증조할머니)가 늘 업고 다니며 뒷시중을 다 들어주실 정도였다는데 그 남다름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할머니가 엄마를 데리고 남의집에 마실을 다니거나 친척집에 갈때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이 엄마의 수저였다고 한다.

어린시절 엄마는 남의집 수저로는 절대로 밥을 먹지 않아 다 닳아빠진 '엄마의 수저'를 늘 갖고 다녀야 했다는데 먹을 것 없고 아이들은 많아 저희들끼리 크던 시절, 그리 유난스러운 엄마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줄 정도로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다.

너무나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아 별명이 치부책(장부)이었다는 엄마는 초등학교 문턱에 발만 살짝 디디다 말았지만 한글과 곱셈, 나눗셈의 산수능력까지 모두 깨우쳤으니 당시 늦동이 막내딸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었을 터였다.

엄마의 엄마인 할머니는 6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한다. 엄마가 열아홉살에 아버지에게 시집 온 후부터는 할머니를 가까이 보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한으로 품고 사셨던 것 같다.

엄마 처녀시절, 일본 사람이 하는 사이다 공장을 다니며 받은 월급은 함께 살던 외숙모에게 고스란히 생활비로 내 놓아야 했기에 할머니에게 맛난 것 한번 사다드리지 못한 것을 너무나 안타까워 했다는 것하며 밖에서 먹을 것이 생기면 꼭 남겨와 할머니에게 몰래 드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먹을것 귀하던 그 시절 할머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던 때 '내가
쌀밥 한 그릇 먹으면 병이 낳을 것 같다'는 그 작은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채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늘 가슴 아파 하던 기억도 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집안의 사랑을 너무나 듬쁙 받고 총명했던 어린시절과는 달리 엄마는 공장을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함께 도왔던 처녀시절부터 결혼한 이후까지 온통 고난의 한평생을 사셨다.

이제 자신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어버려 일흔일곱살의 백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엄마를 찾는 모습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간절한 소망을 어떻게 들어드릴 수가 있을까?
엄마의 엄마, 할머니를 꼭 한번만 만나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포항 오빠와 강원도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이모님과 외삼촌을 우리집에 한번 모셨으면 한다고, 그래서 이제 돌아가실 날 얼마 남지 않은 삼형제가 함께 모여 따순밥 한번 잡숫게 하자고, 그리고 삼형제 모두 고향인 김천에도 함께 모시고 가자고...

한 생을 힘겹게 걸어와 그 종착역이 얼마 남지 않은 삼형제에게 이승에서의 얼마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야 겠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모시고 올 수는 없겠지만 노인의 모습이 되어버린 삼형제가 함께 모여 옛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잠시라도 즐거웠던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아침에 출근 시간에 늦지 않으려 엄마 목욕을 서둘렀다.
엄마는 웬일인지 스스로 옷을 벗어 목욕할 준비를 하고 변기에 오똑하니 앉아 내게 묻는다.

"엄마 어디갔어?"
"누구 엄마?"
"우리 엄마- "
"할머니? 엄마의 엄마? "
"응."
"돌아가셔서 저 하늘나라 계시지. 할머니는 왜?"
"엄마가 보고 싶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나의 말에 힘없이 대답하는 엄마의 모습은 영락없이 엄마 잃은 가여운 아이의 모습이다.

엄마가 '엄마가 보고싶다'고 말하거나 울때마다 내 가슴에선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의 그 애절한 그리움이 남의 일이 아닌 듯 싶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나 또한 엄마가 보고싶어 목 놓아 울겠지.
난 그때 무엇으로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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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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