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와해 후 첫 정부 발표 친일파 106명
의병장 총살 ·3·1운동 때 발포... 그들은 누구?

[심층 분석] 반민규명위의 친일파 1차 명단 살펴보니

등록 2006.12.08 14:42수정 2007.04.1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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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아래 반민규명위)가 해방 61년 만에 1차 친일반민족행위자(아래 친일파) 106명을 확정, 발표했다. 보고서에 담긴 13개 분야의 인물 가운데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친일파들도 많이 있다. 특히 해방 이후 처음으로 국가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발표한 의미는 남달라 보인다.

반민규명위가 선정한 친일파는 1904년 러일전쟁 개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 기간 동안 활동한 인물들이다.

주요 분야는 ▲나라를 팔아넘기고 조선귀족의 작위를 받은 매국·수작(24명)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18명) ▲항일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군·경찰·헌병(8명)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단체 간부(31명) ▲총독부 기관지 등을 발행한 언론인(5명) ▲종교단체 간부(4명)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총살된 군수(2명) ▲항일운동가를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한 판검사(4명) ▲일제에 협력해 은행 등을 설립한 자본가(8명) ▲왕족(2명) 등 총 106명이다.

이번 명단에는 '1급 친일파'로 알려진 '을사오적'과 '정미칠적'뿐 아니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도 다수 포함돼 있다. 분야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살펴보자.

[중추원] 의병장 허위에게 사형 언도한 정인흥

항일의병장을 '토벌'하기 위해 정인흥이 경기도 선유사로 임명됐다는 <대한매일신보>(1907년 8월 29일자) 기사.
항일의병장을 '토벌'하기 위해 정인흥이 경기도 선유사로 임명됐다는 <대한매일신보>(1907년 8월 29일자) 기사.<대한매일신보>
중추원 참여 인물 가운데 선정된 18명 중 정인흥은 대한제국과 통감부에서 판사를 거쳐 1910년 10월 1일부터 중추원 찬의(1921년 4월 27일까지)로 활동했다.

그러나 정인흥은 중추원에서 총독의 자문 노릇을 한 것보다, 통감부 경성공소원 판사부 판사(1909.11.1~1910.9.30)로서 항일 의병전쟁에 참여한 수많은 의병장들을 사형에 처한 판결을 내린 것 때문에 선정됐다고 볼 수 있다. 정인흥이 재판에 참여한 사건은 총 25건이며, 이 중 교수형 또는 사형 언도 사례가 19건이나 된다.


정인흥은 1907년 13도 연합창의군을 이끌고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의병장 허위에게 교수형을 언도했다.

허위는 '을사늑약' 후 고종의 명을 받고 경기도 연천 등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1908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고 경기도 영평에서 체포됐다. 같은 해 10월 3일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달 사형 집행된 허위는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1호'이기도 하다.


이뿐 아니라 정인흥은 ▲조정인(1908.11.7 교수형 언도, 1906년 12월 전라도 나주와 함평에서 의병활동, 아직 훈장 추서 안 됨) ▲한창렬(1908.11.7 교수형, 1908년 2월 경기도 연천 의병, 애국장) ▲김구학·이완보·김순옥(1909.2.6 사형, 1906년 흡곡군 의병) ▲김현국(1909.6.5 교수형, 1907년 7월 경기도 의병장, 애국장) ▲오상원(1909.4.15 교수형, 1908년 2월 함평 등에서 의병, 독립장) ▲유지명(1909.6.5 교수형, 1906~1909년 삼남의병장, 국민장) 등의 재판에도 관여했다.

그 외에 서회보는 1917년 2월 22일 중추원 부찬의가 되어 1919년 7월 29일까지 활동했다. 서회보는 특히 1908년 7월 13일 의병에 대한 이른 바 '대토벌' 때, 충주군수로서 먼저 나서 면민을 단속하고 한글로 공고문을 만들어 곳곳에 게시하는 등 의병 탄압에 앞장섰다.

오제영(1877년생)은 1899년 표훈원(훈·포장 담당 관청) 기수를 시작으로 한일합병 전까지 표훈원에서 근무, 표훈원 기사(주임관2등)에 이르렀다. 표훈원 근무 중 4차례에 걸쳐 일본국 훈장을 받았다(1905년 훈6등 서보장, 1906년 훈5등 서보장, 1907년 10월 훈5등 욱일쌍광장 등). 또한 1911년 2월 25일부터 1920년 1월 29일 사망할 때까지 중추원 부찬의로 활동했다.

최상돈(1869년생)은 1908년 2월 26일 한국상공부 철도국장 겸 광무국장 재직 중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용철도 건설에 조력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4등서보장을 받았으며, 1910년 10월 1일부터 1916년 12월 3일까지 중추원 부찬의로 활동했다.

[헌병] 3·1운동 때 민중에게 발포, 13명 살상한 헌병보조원들

3·1운동 때 민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김성규 등 헌병보조원 3명에게 훈장을 준다는 일제의 공적조서.
3·1운동 때 민중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김성규 등 헌병보조원 3명에게 훈장을 준다는 일제의 공적조서.일본 공문서관
1919년 3월 4일, 평남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시장이 열린 날에 그 일대 민중 3000여명이 공립보통학교와 '야소교(기독교)' 교회당에 집합,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 행진했다.

이때 사천헌병주재소장 사토(佐藤實五郞) 상등병과 헌병보조원 김성규, 강병일, 박요섭 등은 시위민중을 향해 발포, 13명을 살상하고 4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들 세 헌병보조원도 그 자리에서 시위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들 헌병보조원 3명은 3·1운동 때 시위민중을 다수 사살하고 시위대에 의해 사망한 공적으로 1919년 9월 11일 서훈(욱일장 8등, 훈8등 백색동엽장)을 받았다.

[경찰] 의병장 임창모 총살에 관여한 최진태

최진태는 광주경찰서 순사로 근무하면서 의병장 임창모를 총살하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그는 1909년 10월 12일 밤 12시 반, 전남 보성군 복내면 흑석촌에 임창모 의병장 등 9명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듣고 일본인 순사 오오야마(大山七三郎), 일본군 토벌대(보병 제69연대 10중대 임시한국보병 제2연대 제8대)와 함께 출동했다.

최진태와 토벌대는 임창모 의병장이 숨어있는 집을 포위했다. 이를 알게 된 임창모와 그의 장남 학규 등 의병들은 흑석산으로 피신하던 중 최진태와 일본군의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이 전과로 일본군은 최진태와 강인수(보병 제69연대 10중대 임시한국보병 제2연대 제8대중대 배속 광주경찰서 순사) 등에게 견인(見認) 증서를 수여했다. 증서에는 "임시한국파견대 남한폭도토벌행동 중 1909년 10월 12일 밤 한국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흑석촌에서 임창모를 포획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하여 공적이 현저하다고 견인한다"고 기록돼 있다.

순국한 임창모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1906년 지리산에서 의병을 모집, 능주(화순)를 공격해 관청을 불사르고 광주로 가던 중 체포되어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됐다. 1908년 석방되자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고 의병대장이 되어 2300명의 의병을 인솔, 청포·원산 등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관리] 항일운동가에 의해 총살된 두 군수

무장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총살된 계응규와 최병혁 두 군수에게 특별위로금(상여금)을 준다는 일제문서.
무장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총살된 계응규와 최병혁 두 군수에게 특별위로금(상여금)을 준다는 일제문서.일본 공문서관
1920년대에 항일운동가들에 의해 총살된 두 군수도 친일파로 선정됐다.

최병혁은 1911년 황해도 신계군수를 시작으로 황해도 김천·은율군수를 지냈다. 최병혁은 3·1운동 때 시위대 앞에 나서 일본 정치에 따를 것을 호소했고 그 뒤에도 노골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다.

이에 격분한 민양기 외 10여명은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너를 죽인다"고 선언하고 황해도 대동군의 일본 순사 1명과 최병혁을 총살한 뒤 평양감옥에서 사형당했다. 또한 민양기와 함께 재판받은 장덕보(당시 28세)는 징역 1년 6월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복역 중 3개월 10일의 형기를 남기고 가출옥 처분을 받았으나, "조선 사람으로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독립희망을 가출옥한다고 지워버릴 수 있겠느냐"며 거부했다.

계응규도 최병혁과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계응규는 1910년 평북 태천군수, 1914년부터 1919년 사망 직전까지 후창군수로 재직했다. 계응규는 1919년 3월 10일 후창군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헌병과 함께 현장에 출동, 군중에게 "해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했다.

군중은 격분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시위대는 일단 해산했다. 얼마 뒤인 1920년 9월 1일 새벽 3시, 이창덕(함남 북청군 중산면 광천리 출신)은 "계 군수가 군내 시위운동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매양 독립군을 박해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계응규를 총살했다.

이창덕은 의병장 조익선의 부하로 일찍이 무장독립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1919년 3월 중국 봉천성 통화현 칠도구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남만군정서 암살단을 조직한 이창덕은 1920년 9월 22일 충남 강경경찰서에 체포돼, 1922년 사형당했다.

[친일단체] '합방청원'과 의병'토벌' 오명 남긴 일진회·자위단원호회

의병'토벌'에 나선 자위단원. 1907년 이후 일진회원들은 자위단에 소속돼 의병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 수록된 사진이다.
의병'토벌'에 나선 자위단원. 1907년 이후 일진회원들은 자위단에 소속돼 의병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에 수록된 사진이다.<동아일보>
이번 명단에 포함된 인물 중 일진회와 자위단 등에서 활동한 이들은 총 31명.

이용구가 회장을 맡았던 일진회는 "일본의 시정개선을 적극 지지, 수용해 보호통치를 옹호하고 친일 여론을 확산하며 나아가 친일정부를 구성해 일한협력을 공고히 하고 조선지배 정책 수행에 협조할 목적"으로 결성됐다. 1904년 12월 진보회와 합동하고 1905년 11월 일진회 선언서를 공표했으며, 1909년 이른바 '합방청원서'를 발표한 대표적인 친일단체다.

일제와 한국정부는 1907년 7월 이후 구한국군인들이 합세한 의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이른 바 '토벌'작전을 대규모로 벌였는데, 일진회는 자위단을 만들어 이 작전에 참여했다.

1907년 9월 19일 일진회 부회장이던 홍긍섭은 특별총무위원회에서 의병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1907년 10월 회원 30명을 선발해 지방 상황과 의병활동 실태를 조사하도록 각지에 파견했으며,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수립한 의병진압책을 그 달 하순 내각과 법부에 발송했다.

이용구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자위단 조직을 건의했고, 이완용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같은 내용을 요청했다. 1907년 11월 6일 이토는 부통감, 한국 주둔 일본군 수뇌부들과 회의를 열고 일진회에서 작성한 자위단 조직을 채택했다. 1907년 11월 9일 내부대신 임선준의 이름으로 자위단 규칙이 발표됐다. 1907년 11월부터 조직된 자위단은 1908년 2월 말 전국적으로 총 1990개에 이르렀다.

홍긍섭은 1905년 일진회 평의원과 부회장(1906.12.21, 1907.12.27, 1908.12.21)을 역임했다. 또한 1907년 10월 이완용과 송병준 등이 고문을 맡은, 일본 '황태자' 환영을 위한 경축행사 주관 단체인 한성부민회를 조직해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11월 3일 통감부에서 개최한 '천장절'(일왕 생일) 원유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됐고, 1908년 8월 8일 오후 1시 독립관에서 의병에 맞서 전투에 참여한 일진회원 966명을 위로하는 추도식이 열렸을 때 추도문을 낭독했다. 1909년 10월 27일 홍긍섭은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조문대표로 참석했다.

김사영은 1904년 12월초 일진회 경남지부장을 지냈다. 원세기(1907년 자위단원호회 제6부위원장, 1908년 일진회 총무원), 이범철(1907년 자위단원호회 제11부위원장), 홍윤조(1907년 자위단원호회 제7부위원장, 1910년 일진회 총무원), 한국정(1907년 자위단원호회순회총부 향관) 등도 자위단원호회 간부로 활동했다.

[토호] '합방청원' 자금 모은 친일파 부호들

1925년 5월 22일 친일파 백인기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사로 당선됐다고 보도한 <동아일보>(1925년 5월 24일자) 기사.
1925년 5월 22일 친일파 백인기가 동양척식주식회사 간사로 당선됐다고 보도한 <동아일보>(1925년 5월 24일자) 기사.<동아일보>
전북 전주의 토호이자 소문난 부호이던 백남신·백인기 부자도 이번 명단에 포함됐다.

1911년 당시 50만원 자산가로 알려졌던 백남신은 궁내부 영선사 주사(1897년 7월), 전주 진위대 향관, 전북 각 군 지방위원설립위원장(1906년), 전북금융조합설립위원장(1907년 3월), 전주농공은행 감사, 전북 지방재판소 설립회장, 전북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1908년)으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 백인기는 육군보병 참위(1903년), 한성농상은행 감사, 한일은행전무 취체역, 조선식산은행 상담역, 경기도 도회의원과 중추원 참의(1927~1930년),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 등을 지냈다.

'경성'의 대표적 친일자본가 백완기는 1908년 일제의 대표적인 경제 수탈기구이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위원으로 일했다. 1909년 일진회의 이른바 '합방청원' 운동을 위해 이봉래·엄주익과 함께 거금 10만원을 모아 일본으로 갔다. 1910년 1월 26일엔 '천장절' 축하회의 설비위원으로 일했고, 1912년 8월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자 경성부 조문대표로 일본으로 갔다.

백완기는 1915년 '시정(조선통치)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부회장으로서 공진회 금융부문 공로상을 수상했다. 1916년엔 "내선인(일본과 조선인)의 융화와 동양 전민족의 번영과 강녕을 기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대정실업친목회 발기인 겸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1918년 10월 6개의 농공은행을 강제 합병해 설립된 조선식산은행의 설립위원으로 일했다. 1928년 천황대례기념 서위서훈 때 일본정부에서 금배 1개를 받기도 했다.

[종교] 신의 이름을 빌어 일제에 빌붙은 승려와 목사

<조선공로자명감>에 소개된 조진태. 이 책에서 조진태는 중추원 참의로 활동한 조선통치의 공로자라는 칭찬을 받았다.
<조선공로자명감>에 소개된 조진태. 이 책에서 조진태는 중추원 참의로 활동한 조선통치의 공로자라는 칭찬을 받았다.<조선공로자명감>
김용곡(1917~1920년 범어사 주지)은 1917년 9월 이회광 등과 함께 불교계 일본시찰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후 <반도시론>(1917년 12월 10일자)에 발표한 소감에서 "데라우치 수상이 조선총독으로 있으면서 오백년 동안 쇠퇴했던 불교를 일으켜 세웠으니 조선 불교의 행운"이라고 칭송하고 일제의 종교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1919년 1월,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으로 취임한 후 "(일제) 당국에 부응하지 못해 유감"이라며 "총독부 정책에 십분 호응할 것"을 다짐했다.

또한 1919년 7월 <조선불교총보>에 발표한 '경고법려(警告法侶)'라는 글에서 김용곡은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경거망동하는 무리" "치안을 방해하고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경박자들"이라고 매도하면서 승려들에게 성심성의로 일제의 정책을 체현할 것을 요구했다.

유일선(1879년생, 일본조합교회 목사)은 동지사(同志社) 대학 신학부에서 수학하고 일본조합교회(1910년대 식민지 경영과 기독교 전도를 병행한 일본기독교교단) 조선전도부 부주임으로 활동했다. 1911년 조선인 최초로 일본조합교회 집사로 선출된 유일선은 1913년 유신회를 결성,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주도권 쟁탈전에 가담해 총독부의 '조선기독교교회 일본화' 방침을 실현하는 데 앞장섰다. 1919년 9월 중추원 회의에서 '철저한 내선일체'라는 제목으로 시국강연을 하기도 했다.

[언론] 펜으로 부역한 '제국주의의 마름'들

이번 명단에 포함된 대표적 친일언론인은 이인직·변일·신광희·선우일·최영년이다.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로 알려진 이인직은 1907년 친일 논조를 보인 <대한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이완용의 밀사로 일본 측과 내통한 이인직은 1912년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헌송문(獻頌文)을 바치기도 했다.

변일은 <대동일보> 초대 편집장(1909년 7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1910년 10월 22일부터 1915년 1월 중순까지)을 맡았고 신광희는 <대한신문> 사장을 맡았다.

일진회 기관지이던 <국민신보> 기자였던 선우일(본명 선우선)은 변일의 뒤를 이어 <매일신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1918년 9월 중순까지). 1919년 7월 21일 만주 봉천에서 일제의 지원을 받아〈만주일보>(일제가 해외에서 한글로 발행한 첫 일간지)를 창간했다. 1921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간도일보>를 경영했다. 친일단체인 대정친목회 평의원으로도 활동했다.

최영년은 <황성신문> 주필을 하다가 변절했다. 1905년 일진회 총무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민신보> 사장을 맡았다. 1917년 <조선문예> 사장이 됐고, 1920년 친일협력 단체인 대동사문회 발기인 등을 맡았다. 특히 <국민신보> 사장 시절, 신문에 '합방건백서(청원서)'를 게재하고 독자들에게 일본병합 찬반투표를 하게 하기도 했다.

반민특위 와해 후 최초로 정부에서 발표한 친일파 명단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소개한 <대한매일신보>(1908년 6월 28일자) 기사. '일진회 정부'라는 제목으로 홍긍섭과 최영년 등이 각 부 대신이 된다는 풍문을 옮겨 놓은 기사.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소개한 <대한매일신보>(1908년 6월 28일자) 기사. '일진회 정부'라는 제목으로 홍긍섭과 최영년 등이 각 부 대신이 된다는 풍문을 옮겨 놓은 기사.<대한매일신보>
이번 1차 명단은 1949년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에 의해 반민특위가 와해된 후 최초로 정부 단체에서 친일파 명단을 확정, 발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번 명단에 포함된 친일파는 매국노에서 말단 순사까지 다양하다.

1904년부터 1919년 3·1운동까지로 기간을 한정한 것과 관련, '너무 숫자가 적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반민규명위가 2차, 3차까지 친일파들을 확정, 발표하더라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5년에 발표한 3090명보다 적을 가능성이 높다.

이 차이는 반민규명위의 경우 해당 지위보다 행위를 중심으로 조사한 데서 비롯한다. 예를 들어 중추원 찬의 또는 부찬의를 지낸 인물 가운데 독립운동에 참여한 이시영(부찬의, 상해 임시정부 부통령)처럼 이번 명단에 포함되지 않은 이들도 있다. 또한 임기가 짧았거나 두드러진 친일 행위가 발견되지 않은 이들도 빠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기 의병전쟁에 참전하거나 밀정 등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군·경·헌병보조원의 경우, 발표된 명단에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을사늑약' 후 의병 진압에 직접 참여한 일진회 회원과 순사, 헌병보조원 등이 수천 명에 이르지만, 행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료가 포착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립운동을 저지했거나 살인을 저지른 친일파를 계속 발굴하는 것도 과제로 남았다. 특히 2·3차 발표 때는 독립운동 등에 헌신한 이들 가운데 일부 섞여 있는 친일파를 밝혀내야 하는 어려움도 따를 것으로 보인다.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1차 명단 발표 후 보수언론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들은 "'위안부'가 강제동원됐다는 증거가 없다"는 등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의 말을 빌려서 '명단 발표는 실익이 없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가 많으며, 친일파 문제는 학문적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연구자들에게 '재판권'까지 줘서는 안 된다'며 반민규명위 활동을 폄하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세에 대응할 방안을 마련하는 것도 반민규명의 과제다.

'을사오적'에서 조선귀족까지
1차명단에 포함된 거물급 친일파들

일제에 나라를 통째로 넘긴 매국노('을사오적', '정미칠적')와 수작자(조선귀족)도 이번 1차 명단에 포함됐다.

우선 '을사오적' 중 박제순·이근택·조중현·이완용이 포함됐다. '정미칠적' 중에선 고영희(자작, 한일합병에 협력한 이들에게 포상금 형식으로 일왕이 하사한 은사공채 10만원, 1910년~1916년 중추원 고문), 임선준(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1910년 자작, 은사공채 5만원, 1910년~1920년 중추원고문), 이병무(한일신협약, 1910년 한국병합조약, 1910년 자작, 은사공채 5만원, 구한국군 해산), 이재곤(1907년 한일신협약, 1910년 자작, 은사공채 5만원, 1910년~1915년 중추원고문), 조중응 등이 포함됐다.

또한 1910년 일본에게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은 김성근(1910년 10월 자작, 은사공채 5만원), 김학진(은사공채 2만5천원), 남정철(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민영소(자작, 은사공채 5만원), 민종묵(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윤웅렬(윤치호의 아버지, 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이건하(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이근명(자작, 은사공채 5만원), 이봉의(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이용원(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이주영(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정낙용(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정한조(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최석민(남작, 은사공채 2만5천원), 이범팔(부친 이건하 사망 후 남작 습작) 등이다.

왕족인 이준용·이재곤도 포함됐다.
반민규명위가 1년여라는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1차 보고서를 편찬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반민규명위는 "기초자료 수집과 조사, 객관적·실증적 자료 분석"등을 토대로 친일파를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특히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던 헌병보조원 등을 발굴한 것도 두드러진 성과다.

매국 수작자나 중추원 참여자 명단이 지난 8월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친일재산조사위)로 넘어가고, 친일재산조사위에서 이들이 일제한테 토지 등을 받아 재산을 축적했는지에 대한 조사도 병행할 것으로 보인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자체 조사 결과를 12월 또는 내년 초에 발표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활동기간이 길지 않았는데도 친일파들의 행위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보고서까지 편찬한 반민규명위가 앞으로 펼칠 활동이 주목된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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