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훈장'은 장난감이었나?

[나의 6월 이야기] 어떤 '훈장'과 '속이구'의 추억

등록 2007.05.28 15:00수정 2007.05.30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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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나에게 특별한 기억을 선사한다. 우선, 내가 받은 어떤 "훈장" 때문에 그러하다.


내가 훈장을 받다니? 상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어서 그 흔한 우등상 하나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내가 훈장을 받다니! 이 기막힌 이야기는 오래 전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다.

1980년 그 당시 나는 육군 일병이었고 그때는 휴식 시간이었다. 내무반으로 소대장이 들어오더니, 커다란 봉투에서 무언가 꺼내기 시작했다.

"이거 훈장이야. 잘 간직했다가 제대하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도록 해라!"

내무반 침상에 앉아 있는 병들에게 하나씩 돌리다가 소대장이 드디어 내 앞에 와서 섰다. 누런 봉지를 하나 내밀면서 소대장이 씩 웃는다.

"너는 애인에게 자랑하고."


소대장이 내무반을 나간 후, 우리는 모두 그 봉지를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정말로 '훈장'이 있었다. 모두 놀랐다.

정말로 훈장처럼 생긴 훈장이었다. 비록 싸구려 양철로 만든 조잡한 것이었기는 하였지만, 훈장 모양을 갖추고 있는 훈장이었다. 색깔도 알록달록하였다. 나 같은 '쫄병'이 언제 훈장을 만져 보기나 했겠나? 텔레비전 박물관 같은 데에서 보던 것과 아주 비슷하게 생겼더란 그런 말이다.


"이거 정말 훈장이네?"

모두들 감탄했다. 심심한 우리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생긴 셈이었다. 아니, 장난감이라는 말이 더 맞을는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만져보고, 가슴에도 달아보고, 거울도 쳐다보고, 모두들 즐거워했다.

"이거 왜 주는 거지? 우리가 왜 훈장을 받는 거야?"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쳐들었다. 정말, 왜 우리에게 이 훈장을 주는 것이지?

"봉투 안에 있는 종이 읽어봐라."

내무반 구석에서 삐딱하니 누워 있던 병장 고참이 한마디 한다. 그 고참 말대로 누런 봉지 안을 보았다. 조그만 종이쪽지가 삐져나왔다. 오래 전의 일이라서 정확한 기억은 아니겠지만, 대충 이렇게 써 있었다.

"국난 극복 기장: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한 사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이 기장을 수여한다."

'국난극복기장'이라고? 무궁화훈장, 화랑무공훈장, 그런 말은 들어보았지만, '국난극복기장'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사병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도 그랬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욱더 이상한 것은 훈장 수여식은 굉장한데, 이 '훈장'은 어째서 수여식조차 없는가?

취침 점호 때, 일직사관이었던 보급계 이 상사의 설명이 없었다면, 나는 고개를 계속 갸우뚱거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폭동 일으킨 것은 너희도 알지? 그 폭동이 잘 진압되었다고 너희들도 훈장을 받는 거다."

아항. '국난'이란 '광주'를 이야기한 것이었고, '극복'이라는 말은 '진압'을 의미한 것이었구나. 그런데 왜 내가 훈장을 받나?

그 당시 나는 광주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다. 우리 부대는 휴전선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주둔해 있었고, 멀리 남쪽으로 행군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광주라니? 더구나 우리는 시민이고 '폭도'들이고 간에 '진압'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대원 중 '광주 진압 작전'에 참여한 부대원이 한 명 있기는 있었다. 그는 김 하사였다. 김 하사는 장기 하사관이었고, 중사 진급을 위해 광주 근처에 있는 교육 사단에 가서 교육을 받는 도중 5.18을 맞았다. 그래서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다고 하였다.

김 하사는 우리 부대에서 태권도 교관을 할 만큼 태권도에 능했다. 태권도 교육 시간에 그가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광주에 있을 때 말이야. 우리 부대원들이 선동에 앞장서던 여자애를 잡아온 적이 있었거든. 그년 아주 독종이더라. 물어도 대꾸도 안 하고, 내가 똑바로 서라고 그러니깐, 독한 눈으로 쏘아보기만 하더라구. 그래서 옆차기 한 대 날렸지."

무지막지한 김 하사였다. 덩치도 컸다. 그런 큰 덩치의 김 하사가 그 무지막지한 옆차기를 가만 서 있는 여자에게 날렸다면, 그 여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태권도 시간에 태권도 대신, 생전 보지도 못한 그 여자를 생각했었다. 군홧발로 차인 그 여자는 살아남았을까? 혹시, 가슴이 뭉개지지나 않았을까?

어떤 외부 소식이라도 검열을 거친 다음에야 부대 안으로 전해지던 그때, 그 부대에 갇혀 지내던 내가 실제로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부대 모두 연병장에 집합시키더니, 광주에 관한 설문지 답안을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보안대 지시라고 하면서, 간부들은 직접 설문지를 돌렸다. 그 질문지에 나온 질문들을 내 기억나는 대로 하나만 적어보겠다.

"광주에서의 폭동을 간첩들이 주도했다는 정부 발표에 귀관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이가 그리 흔하지 않던 시대라서 그것은 '똥종이'였다. '똥종이'라 하면, 지금의 두루마리 휴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재생 갱지이다. 하도 후져서 연필로 잘못 쓰면 종이가 찢어진다. 그래서 똥종이라고 불렸다. 더구나 색깔도 깔끔하지 않고, 싯누리끼리했다.

나는 그 똥종이 설문지에 쓸 말을 궁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끙끙거리다가 옆을 바라보니깐, 펜을 놓고 있는 병들도 많았다. 다들 벌써 작성한 것이었다. 군대 생활 삼년 내내 주입받은 내용을 그대로 갈기면 금방 써질 것인데, 좀 삐딱했던 나는 결국 백지를 내고 말았다.

다음날, 중대장 면담 호출이 있었다. 나 이외에 두세 명이 불려갔다. 바짝 얼어 있는 우리들에게 중대장의 훈시가 시작되었다.

"광주에서 흉악한 폭도들에 의해 소요사태가 난 것은 니들도 들어서 알고 있을 게다. 군에서는 군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만 듣고 그대로 믿으면 되는 것이다. 너희들 답안지가 불량하여 그대로 보안대에 넘길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써!"

다시 백지 답안지를 받은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중대장이 원하는 답을 빨리 써내고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 외에 졸병이었던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중대장은 그 후에도 자주 부대원에게 광주에 대한 훈시를 하였다. 그의 훈시에서 '폭도'와 '간첩'은 빼놓지 않은 메뉴이었고, 그의 말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긴, 확신에 차 있지 않으면, 어떻게 군대에 말뚝 박을 수 있었겠나?

30년 가까이 지난 이 즈음에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도 그는 그 확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제대한 후, 그때 자기가 한 말을 후회하고 있지나 않을까? 그러나 천만의 말씀 같다. 확신범은 무엇이 어떻게 바뀌건 간에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한다. 군대에는 그런 부류가 너무 많았다.

우리 부대 장병들만 그 훈장을 받았을까? 아닐 것 같다. 우리 부대가 5.18 진압에 참여한 적도 없으니, 그건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혹시, 그 당시 모든 국군 장병들에게 그런 훈장을 준 것은 아니었을까?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잡은 신군부들로서는 자기 '졸개'들을 잘 다독거려놓을 필요가 있었을 게다. 그러나 말단 부대의 졸병이었던 내가 어찌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모든 국군 장병에게 주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 부대가 속해 있던 3군 장병들만 받았을까? 제대 후에 보니깐, 내가 속해 있던 3군 사령관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는 신군부에서 핵심이었고, 전역 후에는 전두환 정권에서 출세가도를 달린 사람이다. 그의 '충정'이 그의 부하였던 나에게도 훈장을 안겨준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 훈장을 갖고 있지 않다. 제대할 때 오물통에 버렸다. 군대 생활하였던 부대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는 제대병들의 격언을 실천한 것이었다. 군대생활이 오죽 지겨웠으면 그 방향으로 오줌도 안 쌀까?

그렇지만, 5월이면 그 훈장이 생각 난다. 지금 가지고 있으면, 얼마나 훌륭한 역사자료가 될꼬? 군대 생활할 때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 훈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달리도 생각된다.

아니, 설령 갖고 있었다고손치더라도, 훈장의 가치는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5.18 관련 서훈들이 모두 취소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그것들이 훈장을 줄 때, 장부에 내 이름이나 등재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냥 생색내려고 한 것이었으니, 내 이름이 훈장 수혜자에 들어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군사독재 시절의 대형 사기가 원체 많아서 이런 훈장 사기는 그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보훈처나 국방부 어디서인가 내 이름이 서훈자 명단에 들어 있을까?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이 있다. 군사독재 비리를 밝히는 수많은 공청회가 있었어도, 이 사기 훈장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별 볼일 없는 졸병들에게 내던져 준 그 가치 없는 훈장, 아무런 보상도 없는 훈장, 그런 것이라서 그냥 지나친 것일까? 내가 받은 그 훈장은 정말 장난감이었던 모양이었다.

또 한번의 사기 '속이구'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다시 한 번 전두환 일당의 사기를 맛보게 된다. 제대 후에 나는 대학원을 마치고 석사를 받고는 대학 강사로 생활하였다. 그 당시 대학은 그야말로 살벌한 곳이었다. 강의는 감시받고 있어서 좀 삐딱한 발언이 있으면 곧바로 신고가 들어갔다. 학과장들은 강사들이 '말실수'하지 않도록 당부, 또 당부하였다. 캠퍼스는 '짭새'라고 불리던 사복 경찰들의 세상이었다. 무전기를 들고 있는 '짭새들'은 그 당시의 캠퍼스 분위기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른바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무법자들이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그들은 전투 경찰 중에서 무술 실력이 뛰어난 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하였다. 그들은 캠퍼스의 무법자들이었다. 그들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은 경찰복도 아닌 청바지를 입고 역시 같은 색깔의 윗도리를 제복으로 입고 있었다. 머리도 길었다. 그들은 평소에 캠퍼스 잔디 위에 스무 명 정도 모여서 군데군데 앉아 있다가, 시위가 일어나면 벼락같이 출동하는 것이었다.

백골단 때문에, 캠퍼스 데모는 기습 시위일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유인물을 뿌리면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하면, 백골단은 잔디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들의 폭력 또한 무시무시했다. 시위학생을 잡아들이기 위해 미사일 같이 몸을 날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시위 학생들 중에 여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백골단이 그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것이었다. 그 당시, 백골단은 '악명 효과'를 노리는 듯하였다. 끔찍한 시위 진압이 다른 학생의 시위를 예방할 수 있는 경종이 될 수 있다는 계산이었을까.

참으로 끔찍한 광경들이었다. 시위가 일어나고 백골단이 그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를 때,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요란했다. 잡혀가는 학생의 비명 소리도 있었지만, 주위 건물에서 그 폭력을 지켜보는 학생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가 더 컸다. 그리고 그 비명 소리는 건물을 오가면서 메아리쳐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이러한 상황이니, 전두환 정권을 지지하는 학생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무지막지한 폭력에 드러내고 항의를 못할 뿐이었지, 상황은 임계점에 다다른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두환 일당이 발표한 이른바 '호헌'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때에는 시위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가 없었다. 단지, 시위 가담의 정도가 달랐을 뿐이었다.

엄청난 시위가 캠퍼스에서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일어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최루탄 가스 냄새가 풍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강의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출석률도 낮았지만, 강의실 바깥의 웅성거림과 구호로 인하여 강의는 겉돌았다. 도서관 6층에서 구호를 외치다가 '짭새들'의 추격을 피하다가 추락하여 죽는 학생이 그 당시 있었다. 그런 상황이 강의실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평화로운 강의는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우리 강사들은 그 당시 아주 어정쩡한 신분이었다. 데모에 참가하자니, 몇 푼 안 되는 밥줄도 끊길 것 같아서 전전긍긍하던 백면서생들이었다. 그저 소주잔이나 기울이며 시국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들이었다.

그러던 유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중대 발표가 있었다. 전두환으로부터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접선거를 지지하고 나선 것이었다. 지금도 그 느끼한 당시 노태우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느끼한 것이 문제인가. 우리는 환호하였다. 드디어 항복하였구나.

그리하여, 그날 저녁 우리 강사 몇 명은 신림시장 안의 파전집에 모여서 축배를 들었다. 그날은 주머닛돈 아까운 줄 모르고 술 마셨다. 대취해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뻗어서 잤다. 오랜만에 즐기는 숙면이었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백면서생일 뿐"이라는 자각을 되새길 때까지 그리 오랜 시일이 필요치 않았다. 몇 년 후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그 6.29선언은 전두환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다만 쇼를 한 것뿐이었는데 순진한 우리들이 그것을 항복 선언이라고 해석한 것이었다.

그때 강사하던 친구들이 모이면 가끔 그 이야기를 한다. 우리도 이제는 6.29선언을, 사람들이 흔히 그렇게 부르듯이, "항복 선언"이 아닌 "속이구 선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 물정, 그 정치판의 귀신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백면서생이었음을 상기한다. 또 한편, 수많은 학생들의 희생 위에 이루어진 민주화가 제대로 꽃 피우지 못함을 한탄한다.

매년 이 즈음 "속이구" 때가 되면 그때 그 당시 자신의 몸을 던져서 민주화를 위해 희생했던 학생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지금 상황을 보면 얼마나 복장이 터질까?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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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속이구 #국난극복기장 #훈장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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