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로마인 이야기] 칼리굴라와 연산군의 비교, 그리고 6월 항쟁

등록 2007.06.30 17:10수정 2007.06.3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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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저 이야기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한다면 인류의 발자취의 탁본이며, 조금 편하게 말한다면 바로 어제의 우리의 모습에 대한 일기이다.

인간이란 과거를 바라보며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하는 존재란 말이 있듯이, 우리에게 과거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나태한 생활을 심기일전하고자할 때 지나간 일기를 또는 언젠가 끄적인 파이팅의 문구를 들춰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로마를 접한 것은 순전히 <로마인 이야기> 덕분이다. 어렸을 때 형의 책장에 꽂혀있던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첫째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둘째는, 로마와 우리의 역사를 비교하며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전편을 통해 시종일관 패자마저 동화시키는 로마의 개방성을 높이 평가하며 그 후 어느 제국도 이를 재현하지 못했음을 소리 높여 질타한다. 나로서는 제국에 대한 걱정까지 할 여유는 없지만, 그의 비판정신만큼은 본받고자 한다.

전쟁만큼 그 민족의 민족성을 드러내는 것도 없다고 한다. 민족간 대결인 전쟁이라면 각 민족간의 특성이 뚜렷이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민족 내부에서의 문제 해결능력까지 보기 위해서는 민족 내부의 다툼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내가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집중했던 부분도 바로 그 부분이다. 잘못된 지도자에 대한 민족의 대응, 이른바 폭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나는 로마의 자세와 우리나라의 자세를 비교, 대조함으로써 어떠한 자세가 보다 더 나은 방법인지, 혹시 그러한 자세의 차이가 로마는 제국으로 나아가고, 우리나라는 반도국에 그치게 된 원인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러한 자세를 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그걸 위해서 우선 나는 로마의 폭군인 칼리굴라와 조선시대의 폭군인 연산군을 비교한 후 현대 대한민국의 6월항쟁의 의의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칼리굴라와 연산군

사전적 정의를 접어둔다면, 폭군이란 지도자의 위치에 선 사람이 그 책무를 다하지 않고 사익을 추구한 자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상에는 카이사르와 같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공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드문 케이스다. 칼리굴라와 연산군은 이런 면에서 폭군이라고 불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둘은 의외로 닮은 점이 많아서 놀랍기도 하다. 폭군의 탄생도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칼리굴라와 연산군은 모두 훌륭한 아버지와 성격 있는 어머니를 부모로 두었다. 칼리굴라의 아버지는 게르마니쿠스로, 그는 게르만 정벌에 높은 전과를 세우고 그에 대한 일종의 신화까지 발생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칼리굴라의 어머니는 아그리파나인데, 그녀는 로마의 제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에 반발하며 파벌까지 형성하다가 끝내 유배형을 당해 죽는다.


연산군도 이에 못지않다. 연산군의 아버지는 조선 제 9대 왕인 성종으로, 성(成)이란 시호로 보아 알 수 있듯이 조선 최고의 번영기를 일구어내었다. 그에 비해 연산군의 어머니는 투기가 심한 여인으로 후궁을 독살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성종의 얼굴을 할퀴기까지 하다가 결국 폐비되어 사사된 인물이다.

딸은 아버지를 닮고 아들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속설을 믿는다면 칼리굴라와 연산군의 폭군적 면모는 그들의 성격 있는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전이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폭군이 된 이유가 오로지 훌륭한 아버지와 성격 있는 어머니 때문이라면 너무 억지스럽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 또는 자격지심, 불행한 어머니에 대한 동정심, 외로웠던 어린시절의 울분이 그들을 폭군으로 만들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즉위 초기의 모습

칼리굴라와 연산군은 모두 즉위 초기에는 소위 '선정'을 폈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의 냉철하다 못해 냉정한 통치를 변혁하고 사회의 침울한 분위기를 활력 있게 만들었다.

연산군도 즉위 초기 4년 동안은 성종시대의 풍부한 인재와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용하여 오히려 성종 말년 횡행한 퇴폐분위기를 일소했다. 하지만 칼리굴라도 연산군도 이러한 선정을 지속시키지 못했다. "선정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는 지도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요소"라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칼리굴라는 병에서 회복된 뒤부터,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계기로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했다. 칼리굴라는 각종 오락 스포츠를 성행시키면서, 연산군은 흥청이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자신의 쾌락욕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문제는 재정이었다. 사치행각은 필연적으로 재정의 낭비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타개책 역시 둘은 흡사했다. 칼리굴라는 국가반역죄 처벌법을 악용하여 원로원의원들로부터 재산을 강탈했고, 연산군은 공신들의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면서도 그 둘의 사치 행각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제국 로마와 반도국 조선의 차이에 대한 열쇠

칼리굴라와 연산군은 폭군이 된 연유, 즉위 초기의 선정, 이후의 실정까지 거의 흡사하다. 하지만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은 몰락의 양상이다.

연산군은 재위기간이 12년에 이를 정도로 오랫동안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연산군의 학정에 못 이겨 그를 축출하려는 계획은 성희안과 박원종이 가장 먼저 세웠다. 성희안은 형조참판, 이조참판을 거친 인물이며 박원종은 동부승지, 좌부승지 등을 거친 인물이었다. 이 둘은 이조판서 유순정 등을 끌어들여 연산군을 폐위한다.

이에 비해 칼리굴라는 재위기간도 4년으로 연산군에 비해 그 기간이 매우 짧다. 또한 칼리굴라를 살해한 사람들은 원로원 의원이 아니라 근위대 대대장인 카이레아였다. 그리고 카이레아는 클라우디우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고 스스로는 황제 살해를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세력은 로마로 치자면 원로원 의원들이다. 하지만 칼리굴라를 살해한 자들은 원로원 의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제국 로마와 반도국 조선의 차이를 말해준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폭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근위대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이다. 하지만 출신 계급은 문제삼지 않았다. 병사의 질만이 유일한 심사기준이었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카이레아는 이 근위대의 대대장이었다. 원로원 의원도 아닌 이들이 칼리굴라를 살해한 것은 사적인 동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위해서였다.

시오노 나나미가 지적하듯, 게르마니아 군단에서 군 생활을 하고 게르마니쿠스 신화를 신봉한 카이레아는 칼리굴라를 마치 어린 자식처럼 생각했을 것이고 못난 자식을 죽이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작은 군화(칼리굴라)'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보통 로마가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로, 첫째, 브루투스나 스키피오, 카이사르와 같은 위대한 개인들, 둘째,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특색을 효율적으로 짜 맞춘 정치체제, 셋째, 패자마저 동화시키는 로마의 개방성, 넷째, 로마 시민의 실질강건의 민족성을 꼽는다. 나는 이러한 분석이 카이레아의 칼리굴라 살해에도 유효하다고 본다.

카이에라가 물론 위대한 개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비록 근위대 대대장이지만 원로원의원도 아닌 카이레아가 아무런 흔들림없이 칼리굴라를 살해한 것은 로마의 정치체제, 로마의 개방성, 그리고 로마의 민족성 때문이다.

즉, 로마는 건국 초기부터 귀족과 평민의 끊임없는 계급대립 대신 능력 우선주의의 자유경쟁을 택했다. 모든 국가요직을 평민출신에게도 개방하기로 한 리키니우스 법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 원로원 의원에게도 출신 가문, 성장기의 교육이 아닌 순전히 능력과 경험만을 요구한다.

로마의 인재풀은 제정 때 더욱 확대되었다. 제정의 특성상 오로지 1인뿐인 황제는 보다 더 많은 인재를 필요로 했고 그 결과 황제조차 속주출신이어도 무방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로마인들은 로마인이라는 사실 자체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고, 능력이 없는 지도자도 모셔야만 한다는 동양의 충(忠)같은 정신적 굴레에도 속박되지 않을 수 있었다. 카이레아가 칼리굴라를 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로마의 모습이 바로 로마를 제국이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다.

그에 반해 조선에서는 연산군의 재위기간이 무려 12년이나 되어서야 비로소 거사가 일어났고, 그것도 양반계급에서의 반발이었다. 평민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일관했을 뿐이다. 로마가 제국으로 나아간 이유와 조선이 반도국에 머물게 된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회의 역동성의 차이 때문이다.

현대 대한민국의 모습

그러나 현재 2007년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쩌면 로마보다도 더 긍정적이다. 신분제도 자체가 타파되었고, 독재정치에는 민중전체가 들고 일어나서 싸웠다. 아직 평가가 진행중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사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현대판 폭군으로 볼 수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 맞서 싸운 6월 항쟁은 대한민국 전체가 주역이 된 것이었다. 사회의 역동성이 로마를 발전으로 이끌었다면 현재 대한민국은 발전의 그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로마는 역사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그 영광이 여전히 눈부시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언제나 로마와 같은 아니 그보다 더 나은 우리를 꿈꾼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정관의 치를 이룩한 당태종의 명신인 위징은 "치세를 바꾸는데 1년이면 족하고, 3년이면 너무 길다"라는 말을 했다.

6월 항쟁에서 우리가 흘린 붉은 피와 굵은 땀방울, 그때의 거친 숨소리는 새로운 시대에 대해 바치는 우리의 헌사였다. 이제는 여기서 얻은 사회의 역동성으로 우리가 전진해야 될 때라고 본다. 우리 스스로가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자각하면서, 마치 로마시민이 스스로가 로마시민임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덧붙이는 글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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