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선녀가 선암사 계곡에서 홀랑 벗었시야"

속세 벗어난 보살들, 야심한 밤에 일 벌이다

등록 2007.08.18 10:25수정 2007.08.18 10:2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선암사 대웅전 앞 뜰

선암사 대웅전 앞 뜰 ⓒ 조명자

전남 승주군 조계산 선암사. 1600년 역사를 가진 고찰이다. 전통 가람 배치와 단청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곳. '삐까번쩍한' 불사가 위용을 자랑하는 거찰들만 보다가 만난 선암사는 그래서 더욱 감동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산과 가람과 정원이 모두 아름다운 선암사에 여름휴가 겸 관음기도를 하기 위해 입산을 한 날이 8월 13일이었다. 불교 공부를 하는 모임의 도반들이 8월 15일을 전후해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선암사 원통전 관음기도. 올해가 11번째이니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세월 동안 이어진 우리 모임의 가장 중요한 행사다.

선선한 날씨에 기도를 해도 힘들 텐데 굳이 8월 복중을 택했을까 할 텐데 그럴만한 사유가 있다. 직장이 있는 도반의 경우 기도를 위해 며칠을 쉬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해서 어떤 업체든지 꼭 있게 마련인 여름휴가를 그것도 휴가철이 끝나가는 8월 15일 전후를 택해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11년째 8월마다 선암사에서 모이는 도반들

선암사 기도를 가기 전부터 날이면 날마다 웬 비가 그렇게 퍼붓던지. 전국이 장대비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원통전 기도객'이라는 명분으로 특혜를 받아 차를 몰고 산문으로 들어서는데 길옆으로 난 계곡이 장관이었다.

열한 번의 기도 중에 단 한 번만 빠졌으니 햇수로 십년째 선암사 계곡을 찾아온 셈인데 그날처럼 아름다운 계곡을 본 적이 없었다. 비안개가 자욱한 계곡에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용트림 하는 계곡물. 군데군데 크고 작은 용소가 있는 곳은 그대로 몇 층의 폭포로 변했다.


a 선암사 계곡, 물구경에 무아지경인 두 여인네

선암사 계곡, 물구경에 무아지경인 두 여인네 ⓒ 조명자

차만 없으면 그대로 할랑할랑 걸어도 좋을 텐데. 산문에서 일주문까지의 오 리 길이 어쩌면 그렇게 절경이든지 가는 내내 탄성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오는 중에도 멋진 계곡의 풍광을 즐기기 위해 폭포 옆 바위에 돗자리 피고 삼삼오오 앉아 물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홍예교, 무지개다리라는 선암사의 보물 승선교가 나타났다. 1713년 숙종 대에 세웠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한 자태에서 옛 조상들의 돌 다루는 경지가 어디까지 갔는지 얼추 짐작이 된다.


a 보물 400호, 승선교

보물 400호, 승선교 ⓒ 조명자

2층 누각 강선교 옆을 돌아 일주문 앞에 차를 세웠다. 보따리 두 개 들쳐매고 이 문을 들어서면 어느 광고 카피처럼 며칠만이라도 속세를 잊어야 하건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 가진 무한대의 탐욕을 털기 전엔 세간과 출세간이란 장소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언뜻 웃음이 난다.

그러나 3박 4일이라는 짧은 시간이지만 일년 동안 '신구의' 즉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죄업장을 조금이라도 참회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귀중한 기회인 것 같다. 제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지도 못하는 청맹과니에서 벗어날 기회가 그것이고, 제 지은 죄를 두 번 다시 짓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기회가 또 그것이며 인과응보를 무서워하고 세상 두려운 줄 아는 게 또한 그것이다.

새벽 3시면 일체중생을 깨우는 도량석 목탁 소리가 들린다. 속세 습관 그대로 자정 넘어 간신히 잠이 들었으니 눈꺼풀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나 새벽 3시 40분에 시작하는 새벽예불은 "우짜든둥" 빼먹어선 안 되는 중요한 순서.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선암사 기도 일정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새벽예불 시간이다. 대웅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으면 삼라만상이 고요 그 자체다. '사물놀이'의 사물이 절에서 유래된 만큼 절집의 새벽은 사물(북, 종, 운판, 목어)로부터 깨어난다.

북소리는 지상에서 활개치는 중생들을 깨우기 위함이고, 운판은 날아다니는 중생들을 위한 깨침의 소리다. 물고기처럼 생긴 목어를 긁어내는 소리는 물속에 사는 중생들을 위한 소리요, 울림의 소리가 끝없이 장중한 종소리는 땅속의 미물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다.

사위가 고요한 새벽에 들리는 사물의 울림만큼 내 영혼을 뒤흔든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 그뿐이랴. 선암사 새벽예불은 인간의 목소리가 얼마나 훌륭한 악기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지심귀명례~"로 시작하는 새벽 예불. 비구스님들의 낮고 그윽한 예불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아름다움을 체함하고 싶은 사람은 대본사 사찰 새벽예불에 참여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들어 본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감동. 새벽예불의 합창소리는 수십만 원 호가하는 유명 오케스트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유명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영혼의 울림을 느낄 만큼의 감동을 안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음악의 '음'자도 제대로 모르는 무지렁이들이 들어도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소리, 나아가 그 소리를 듣고 감춰져 있던 영혼의 순수성까지 되살릴 수 있다면 그 소리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 아닌가.

a 원통전 앞 낙숫물

원통전 앞 낙숫물 ⓒ 조명자

a 무우전 툇마루에서 바라 본 조계산

무우전 툇마루에서 바라 본 조계산 ⓒ 조명자


땀국에 빠진 보살들, 샤워할 물이 없다니...

이번 기도 일정은 정말 빗속에서 시작해 빗속에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도착한 밤 내내 그 다음 날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새벽 3시에 일어나 3시 40분 새벽예불을 시작으로 5시 반 아침 공양 때까지 계속 '관세음보살' 정근기도를 한다.

아침 공양 끝난 뒤 잠시 쉬고 다시 8시 반부터 11시 반까지 기도정진, 오후엔 주변 암자를 순례하는 비교적 헐렁한 일정이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6시 저녁공양을 마치고 스님들과 함께 저녁예불을 드린다.

저녁예불 끝나자마자 우리 기도객들만 따로 하는 '관세음보살 정근기도'를 8시 반까지 하고 나면 말 그대로 땀국에 빠진다. 무더운 여름에 모기에 뜯겨가며 1시간 이상 꼼짝없이 서서 하는 기도정진. 말이 그렇지 완전히 고행이다. 합장을 한 채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다 보면 다리는 저리지, 허리는 끊어지지 또 합장한 두 손은 왜 그렇게 천근인지 정말로 '주리를 튼다'는 말이 실감날 때가 기도를 할 때다.

때문에 여름 기도 때마다 적어도 하루 세 번씩 샤워는 필수였다. 그런데 이번 호우에 사단이 발생한 것이다. 선암사에 도착해 보니 전날부터 물이 안 나온다는 것이었다. 엄청난 호우로 급수관이 막혔다는데 물길이 얼마나 거센지 뚫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런 난리가 없었다. 차라리 밥 한 끼는 굶을지언정 샤워는 양보 못하겠다는 게 우리 보살들 아우성이었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땀국에 쪽 빠져 용맹정진을 했는데 씻을 물이 없다니 말이 되는가.

스님들과 행자들은 으슥한 계곡에서 해결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남자들이야 물이 철철 나오는 다른 때도 일부러 냉골을 찾아 '목간'을 했으니 별문제가 없고. 문제는 우리 보살들이었다. 울상을 하는 우리들을 보고 난감해진 스님이 해결방안을 제시했다.

a 대각암 만세루 창문으로 본 배롱나무

대각암 만세루 창문으로 본 배롱나무 ⓒ 조명자

한 15분 정도 가면 당도할 수 있는 '대각암'엔 물이 나오니 급하면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스님 말대로 기도가 끝나면 우르르 대각암으로 몰려갔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따로 목욕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얼기설기 임시로 만든 좁은 헛간에 세탁기가 놓인 세탁장이 목욕탕이었으니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는 시설이었다.

아줌마 7선녀, 계곡물에 몸 담그다

우리가 몰려가면 대각암 행자는 행자대로 불편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스님들 뵙기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하여튼 이틀을 대각암 신세를 지다 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낮에 계곡을 따라 산책하다 보니 철철 흐르는 개울물에 홀라당 벗고 들어가 동무들과 물놀이하던 옛 추억이 떠오른 끝에 생각난 것인데 우리도 이참에 미친 척하고 계곡에서 목욕 한번 해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내 말을 듣자마자 보살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계곡에서 목욕하는 상상만 해도 즐거워 죽겠는 모양이었다. 즉시 야심작에 대한 세부방침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무꾼 없는 '7선녀의 목욕' 얼마나 짜릿한 계획이냐? 계곡물에 첨벙 빠져들 생각을 하니 미리부터 까불고 난리를 치는데 이건 40~50대 아줌마들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절집에선 밤 9시가 취침시간이니 9시 넘으면 스님들이 돌아다닐 일은 없겠다, 마침 절 안에 있는 불자들도 우리 일행들밖에 없겠다, 위험 부담은 크지 않았다. 그래도 만에 하나, 우산을 갖고 나가 두어 명이 망을 보자고 했더니 후배가 냉큼 "언니, 본 사람만 손해여~" 하는 통에 그것도 거둬 버렸다.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 낮에 찜해 두었던 계곡을 찾았다. 계곡물도 정강이 정도밖에 안 차는 안전한 곳이고 더구나 주변엔 풀도 없는 곳이었다. 대로변에 위치한 것이 흠이지만 이만큼 안전한 곳도 없는데 금상첨화로 칠흑같이 깜깜해서 아줌마들이 아무리 홀랑 벗어도 누구한테 들킬 염려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글와글 떠들며 물속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철들기 전 빼고 여자들이 개울물에서 옷 벗고 놀 일이 있을 리 있나? 다 늙어 웬 횡재냐 싶었는지 보살들이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망 볼 경비병 하나 없이 일제히 물속으로 뛰어들어 난리를 치고 있는데 이런, 갑자기 위에서 자동차 불빛이 보였다.

이 늦은 시간에 나갈 사람이 없는데 뭔 일이냐? 우리 남정네들도 문제지만 급한 볼일이라도 있어 스님들이 나가는 것이라면 더 큰 문제였다. 일곱 아줌마들이 완전히 넋이 나갔다. 미처 숨을 새도 없이 자동차는 내려오는데 차를 막고 사정을 설명할 경비병도 없고 죽을 지경이었다.

어떤 보살은 그 와중에도 나무꾼과 선녀를 빗대 농담을 했다. "이걸 어째? 난 자식이 둘뿐이라 하늘로 올라갈 수도 없는데…."

모두가 일제히 계곡가로 붙어 쭈그려 앉았다. 우산으로 망을 보자는 내 의견을 묵살한 후배한테 퉁박을 줬다.

"이 웬수야. 네가 망 볼 필요 없다고 큰소리쳤으니까 네가 책임지고 차 보내!"

그랬더니 후배가 방방 뛰고 난리다.

"오메오메, 언니 무신 소리여… 한 살이라도 낫살 더 자신 언니들이 나서야지. 아무래도 삼겹살보다는 오겹살이 더 위협적이지 않겠수? 이히히히~~"

에구, 그 와중에 자동차가 가까이 와서는 멈칫대며 속도를 내지 않는 것이었다. 물소리에 우리가 주절대는 소리는 안 들렸겠지만 물이 워낙 낮아 물속으로 얼굴을 처박을 수도 없고 완전히 홀랑 벗은 아줌마들이 난리를 쳐대는 꼴이 가관이었다.

다행히 우리 주변에서 약간 멈칫대던 자동차가 그대로 휙 지나쳤다. 자동차 뒤꽁무니가 보이질 않게 되자 그때야 정신이 든 우리. 나중에 보니 황급히 숨으려고 얼마나 허둥댔던지 팔이고 정강이고 멍투성이였지만 하여튼 토끼 용궁 갔다 온 심정이었다.

계곡물에서 원 없이 목욕도 하고, 머리도 감고 물장구도 치고. 잠시 검문에 혼비백산했지만 그때 그 짜릿한 즐거움은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이 된 셈이다. 다음날 자동차에 탄 범인(?)을 물색했더니 다행히 우리 모임 거사들이 야밤에 '곡주' 한잔 하러 내빼는 와중이었단다.

뭘 봤느냐니까 절대로 아니란다. 그래서 왜 멈칫거렸느냐고 하니까 계곡 옆에서 도깨비불 같은 것이 보이더란다. 물가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이 반딧불이라고 하기엔 좀 크고, 도깨비불은 아닐 테고. 무슨 짐승 눈빛인가 살펴보려고 했는데 눈치 빠른 한 거사가 "틀림없이 우리 보살들이 목욕을 하는 것"일 거라고 하기에 그냥 지나쳤단다.

내가 가져간 손전등. 옷 입고 벗는 데 필요할 것 같아 켜놨는데 그것이 도깨비불 혹은 짐승 눈깔처럼 보였을 줄이야. 염천 더위에 참회기도를 하겠다는 보살들이 가상했든지 부처님께서 특별히 내려주신 선물.

올 여름휴가 겸 기도여행은 늙어가면서 무슨 설렘이 있을 리 없는 보살들에게 '스릴과 서스펜스' 그리고 행복한 추억을 남기게 해준 값진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나의 여름휴가 실패기>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나의 여름휴가 실패기> 응모글입니다.
#선암사 #계곡물 #목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4. 4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