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 소년의 무덤가는 길, 이토록 아름답다니

[기차 타고 떠난 영월여행 1] 중앙선 열차는 청량리에서 떠나네

등록 2011.02.27 11:25수정 2011.02.27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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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 가는 길 ⓒ 유혜준


몇 년 전인지 잊었지만 드라마 <모래시계>가 종영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고 기억한다. 정동진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가족을 몽땅 이끌고 중앙선 열차를 탔더랬다. 당연히 자정 임박한 시간에 출발하는 열차였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중앙선 열차의 종착역은 강릉역. 대략 여섯 시간쯤 걸린다. 기차 안에서 한숨 푹 자고 나면 새벽녘에 정동진역에 도착해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예상은 늘 빗나가기 마련. 그날 기차 안에서 우리 가족은 전부 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밤 기차가 그토록 소란스럽고 불편할 줄 몰랐던 것이다. 밤 시간이 어찌나 길고 지루하던지, 그 뒤, 다시는 밤에 출발하는 기차는 타지 않겠노라고 작정했더랬다. 특히 중앙선 열차는.


그 중앙선 열차를 지난 17일에 탔다. 이번 목적지는 정동진이 아니라 영월. 강원도에 엄청나게 내린 눈 때문에 강원도 여행이 망설여졌다. 버스를 타고 가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잠깐 했다. 그래서 떠올린 건 기차. 그래, 오랜만에 기차 타고 여행을 떠나보자. 기억을 돌이키니 기차 여행은 지난 해 12월에도 했다. 경춘선 열차가 사라진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경춘선 열차를 탔던 것이다.

평일 오전에 출발하는 기차에는 당연히 자리가 있겠거니 했는데 내 앞에 서서 표를 사던 남자, 자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남자의 목적지는 태백. 남자는 제천까지 표를 끊었다. 좌석이 없으면 영월까지 거의 3시간 가량을 서서 가야한다는 건데 어떡하나. 하지만 다행히 자리가 있었다. 그것도 특실에. 특실이라지만 값 차이는 1700원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영월까지만.

영월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만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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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역 ⓒ 유혜준


덜컹, 기차가 몸체를 흔들면서 청량리역을 천천히 출발했다. 오전 9시.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뿌우연 빛깔이었다. 흐린 하늘이었고, 공기는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2박3일 일정으로 동생이 동행했다. 기차 여행은 홀로 가는 것보다는 동행이 있는 편이 좋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미리 지도를 준비하면 여행이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 지도는 자치단체 홈페이지에 요청하면 우편으로 보내준다. 가만히 앉아서 각 지역의 지도와 여행 홍보물을 받는 재미, 쏠쏠하다. 자치단체마다 보내주는 지도와 안내책자가 달라 내용물을 보면서 각 자치단체의 여행 마인드도 비교할 수 있다. 지도를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경우, 관광안내소나 역 등에서 지도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영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나, 단종. 동생, 탄광.

한데 영월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만난 건, 단종이었다. 열일곱이라는 채 푸르디푸른 나이에 삶을 접어야 했던 소년 단종. 그가 영월 곳곳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넋이 영월을 배회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영월은 잿빛이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도시 분위기는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도로에서도 느껴졌다. 역 앞에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늙은 여배우의 사진 뒤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여자들의 사진들이 줄 지어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가난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여성들의 사진들이 나란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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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역 앞 풍경 ⓒ 유혜준


영월역을 벗어나, 동강을 가로지르는 영월대교를 건너 영월읍내로 들어섰다. 장릉 가는 길에 만난 허름한 식당에서 된장찌개로 점심식사를 한 뒤, 장릉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 위에는 미처 녹지 않은 눈이 쌓여 있었다. 이따금 자동차들이 달릴 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도로는 한적했다. 헐벗은 나무들이 늘어선 인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 둘만 걷고 있었다.

걷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 차도 건너편을 보는 순간, 사슴 네 마리가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어, 웬 사슴이지? 물론 진짜 사슴은 아니다. 청동으로 만든 것 같은 사슴 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사슴이 아니라 노루였다. 그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장릉노루조각공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노루는 단종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동물이다.

저 눈밭에 노루가... 걸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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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조각공원 ⓒ 유혜준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은 후 사망한 단종의 시신은 염습도 못한 채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이 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들 주저하고 있을 때 엄흥도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지게에 지고 동을지산으로 갔다. 산에는 눈이 내려 쌓여 있어서 모실 곳을 찾기 어려웠다. 시신을 지게에 지고 눈 속을 헤매고 있는데 갑자기 노루가 뛰어 달아났다.

주위를 다시 살펴보니 노루가 앉았던 자리는 눈이 녹아 있었다. 엄흥도는 우선 그 자리에 지게를 버티어 놓고 좀 쉬기로 하였다. 얼마큼 쉬고 나서 엄흥도는 다시 지게를 지고 일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지게 목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힘을 써도 목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엄흥도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파고 단종을 모셨다. 그리고 몸을 피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 - 장릉노루공원에서

노루는 단종이 묻힐 자리를 알려준 영험한 동물이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길 건너편의 동물이 사슴이 아니라 노루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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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눈밭에 노루가...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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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노루조각공원 산책로 ⓒ 유혜준


노루공원은 커다란 호수를 가운데에 두고 그 둘레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 제법 큰 공원이었다. 산책로 옆에는 다양한 모양과 재질의 노루 상들이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너른 호수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호수 한쪽의 눈밭에 노루 가족이 다정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역시 조각상이었으나, 멀리서 보니 꼭 살아 있는 노루 같다.

저 눈밭에 노루가... 걸어가고 있어요. 누군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었다. 영월에 가거든 노루조각공원을 눈으로만 보고 지나치지 말고 꼭 안으로 들어가 걸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장릉 안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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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흥도 정여각 ⓒ 유혜준


장릉은 고즈넉했다. 그곳에 엄흥도 정여각(旌閭)이 있었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이 있는 곳이다. 단종이 죽고 270년이 지난 뒤,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니, 권력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려고 조카를 죽이고, 정조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니, 덧없이 흐르는 세월이 쓸쓸할 따름이다.

단종의 무덤 앞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눈 덮인 장릉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370년이 넘었다는 느릅나무 한 그루가 바람처럼 흘러간 세월을 되짚는 것처럼 보인다.

장릉 안을 오래 서성였다. 이곳 산책 삼아 이리저리 거닐기 딱 좋았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언제쯤 눈발을 날리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는 것처럼 보였고. 소년 단종의 무덤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장릉 안의 이곳저곳을 하릴없이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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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장릉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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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무덤 가는 길 ⓒ 유혜준


내가 여자라서 그럴까, 어린 나이에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가 생각났다. 여든 너머까지 살았던 그 이는 그 모진 세월을 어떻게 견뎠을까. 나중에는 남편의 얼굴조차 가물거리지 않았을까? 부부가 해로하는 것도 복이라는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구나, 싶었다. 흐린 날씨 탓이다, 이렇게 감상적이 된 것은.

그런데 이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 죽임을 당한 소년 왕의 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 기쁨에 넘칠 수 없으니 말이다.

소년 단종을 찾아가는 길은 동선을 잘못 잡았다. 그래서 덜 걸어도 되는데 더 많이 걸었다. 초행길이니 길을 몰라 지도를 보면서 찾아 가다 보니 그리 되었다. 영월읍에서 출발해서 장릉에 갔다가 다시 영월읍으로 돌아와 청령포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어차피 걷는 길, 한두 시간쯤 더 걷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요, 갈 길이 바쁜 것도 아니니 그저 일삼아 걷는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무덤을 먼저 찾았으니, 이제는 단종이 유배되어 살았던 곳으로 가야지. 온 길을 되짚어 영월읍을 지나 청령포로 가는 길로 들어섰다. 잿빛이 점점 짙어지던 하늘이 그예 분무기처럼 물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기온이 올라간 탓일까, 눈이 아닌 비였다. 그것도 안개처럼 흩어지는 비였다. 하늘을 우러러 보면 비가 내리는 것 같지 않은데 온몸이 촉촉이 젖어드는 그런 비.

청령포 입구에 서 있는 모텔 건물은 한창 철거 중이었다. 차량에 달린 거대한 쇠뿔이 콘크리트 벽을 쿵쿵 쪼아대고 있었다. 건물의 한쪽이 철근이 드러나면서 부서져 내린다. 하필이면 청령포 입구에 그런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게 영 볼썽 사나워보였다. 그래서 철거를 하는 건가?

매표소에서 표를 사니, 직원이 얼음 위를 걸어서 가라고 알려준다. 이 무슨 소리?

관광지가 된 소년 단종의 유배지 걷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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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이 묶인 청령포 가는 배 ⓒ 유혜준


청령포 입구에서 청령포까지 거리는 100미터 남짓인데 그 사이에 강이 흐른다. 평소에는 배를 타고 건너지만 겨울에는 이 강이 꽁꽁 얼어붙어 강 위를 걸어서 건너야 한다. 얼어붙은 강은 눈으로 덮여 있었고, 청령포로 가는 길만 눈이 치워졌다. 길을 낸 곳 양쪽에는 말뚝을 박아 줄을 이어놨고, 그 아래 구명튜브가 놓여 있다. 거기에 구명튜브를 모자처럼 쓴 눈사람이 팔을 벌린 채 우리를 반겼다.

날씨가 푹하긴 푹한가 보다. 얼음이 녹고 있었다. 얼음 위에 물기가 흥건하다. 건너다가 강물 속으로 푹 빠지는 거 아냐, 하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얼음은 녹을 것이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 계절의 순환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으므로.

청령포는 멀리서 봐도, 가까이 들어가서 봐도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 숲 안에 소년 단종이 살아생전 기거했던 처소가 옛날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이요, 나머지 한 면은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섬 같은 곳이었다. 영월은 지금도 오지 같은 느낌이 물씬 나는데 조선 시대에는 오죽했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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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어소 ⓒ 유혜준


단종이 기거했던 처소 안을 들여다보다가 흠칫 했다. 웬 사람이지?

이런, 인형이다. 단종은 방 안쪽에 반듯하게 앉아 있고, 갓을 쓴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옛날에, 그 때 이랬다는 거지. 인형이건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 흐린 날씨 탓이다.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음울한 날씨 때문이다.

청령포 안을 거닐었다. 산책하기 좋은 숲길이 있다. 관광지가 된 소년 단종의 유배지를 걷는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걷다가 다시 돌아와 단종어소의 툇마루에 걸터 앉아 쉬었다.

청령포에서 영월읍내 중심가까지는 걸어서 30분 남짓 걸린다.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비는 여전히 안개처럼 흩어지면서 내리고 있었고, 내딛는 걸음은 무거웠다.
#도보여행 #강원도 #영월 #단종 #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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