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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병교육대에 입대한 건 1980년 가을이다. 당시는 전두환을 필두로 한 군벌 등 신군부가 1979년 12·12 군사정변을 일으킨 뒤 공포의 여진이 계속되던 즈음이었다. 입대 전에는 삼청교육대로의 징집 대상을 찾는 데도 혈안이 돼 있는 분위기였다.
'삼청교육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발령된 직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사회정화정책의 일환으로 군부대 내에 설치한 기관이며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 초기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로 꼽힌다는 게 이제 국민적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엔 이 취지와 폐해를 잘 몰랐기에 그저 단순히 "거길 갔다 오면 전과를 없애준다더라" 혹은 "취직을 최우선으로 알아서 해준다"는 따위의 근거불명 소문까지 나돌던 시기였다. 기왕지사 삼청교육대 얘기가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1980년 8월 4일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와 당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령 13호' 발표에 이어 '삼청 5호 계획'이 전국적으로 진행되면서 무자비한 인권탄압이 이루어졌다.
이 결과, 삼청교육대의 소위 '순화교육'은 군대의 연병장 둘레에 헌병이 집총 감시하는 가운데 육체적 고통을 가하는 가혹한 방법의 훈련을 감행하였다. 1988년 국회의 국방부 국정감사 발표에 의하면 삼청교육대 현장 사망자가 52명,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는 무려 2678명이나 발생하였다고 하니 당시의 처참함은 가히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고도 남았음직 하다.
하여간 그같이 으스스한 분위기에서 방위병 복무를 목적으로 입대한 나는 이튿날에 '군인수첩'이란 걸 하나(씩)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31년의 세월이 지난 터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당시에 받은 그 수첩의 페이지는 대략 50쪽에 가까운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마치 야차(夜叉)처럼 무섭게 생긴, 눈까지 찢어진 조교는 그 수첩을 몽땅 외우라고 '명령'했다. 그렇지 않음 '뺑이친다'며. 그래서 그 고된 훈련과정 중에서도 틈만 나면 그 수첩의 내용을 모두 달달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고시공부를 하듯 그 공부에 열중했던 건 암기를 못 하여 속절없이 구타당하는 동기들이 결코 남의 일 같지 않은 때문이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으론 <병의 책무>라는 암기과목이 떠오른다. - '병(兵)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고 복무에 충실해야 한다. 특히 법규를 준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며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
천만다행으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암기에 있어서만큼은 솔직히 소질이 있었고 내처 발군의 실력까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전우들은 암기를 못 해 무수하게 맞았으되 나는 열외였다! 대저 교활한(?) 조교는 어느 신병이 뭘 잘 하는 지를 마치 귀신도 곡할 만치로 그렇게 '족집게'였다.
서너 번 시켜볼 때마다 척척 암기를 잘 해내는 나에겐 더 이상 암기과목의 '숙제'를 부여하지 않아 편했다. 그런데 군대는 역시나 군대였다. 암기과목에선 편했으나 주기적으로 할당이 되어 서야 하는 불침번 근무 때 그만 사단이 빚어졌다. 그건 바로 당황한 나머지 그만 그날의 암구호(暗口號)를 까먹었기 때문이다.
다 아는 상식이겠지만 군대를 안 다녀온 사람과 특히나 군복무 가산점에 반대하는 일부 여성들을 위해서라도 사족이나마 이 암구호의 '정체'를 알려드리고자 한다. '암구호'는 군사용어로써 적군과 아군을 분간할 수 없는 야간에 아군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정하여 놓은 말이다. 고로 매일 이 암구호는 달라지며, 모든 군이 같은 암구호를 쓴다.
여하튼 전우들은 다들 잠이 든, 자정도 넘은 야심한 시간에 총을 들고 내무반 밖에서 망을 설 때였다. 칠흑같이 깜깜한 저만치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냅다 총부리를 그쪽으로 겨누었다. 아~! 근데 이런 대략난감이 세상에 또 어디 있으랴! 너무도 잔뜩 긴장하는 바람에 나는 그만 그 중차대한 그날의 암구호를 까맣게 잊어 버렸으니 말이다.
다만 당황하여 "거기 섯! 누구여?"라는 말만을 앵무새처럼 지껄이는 건 잊지 않았다. 잠시 후 보무도 당당하게 나타난 이는 무궁화가 두 갠가 세 개인가 아무튼 그리 많이 붙어있는 고급장교였다. 그는 연신 그날의 '답변용' 암구호를 반복하였는데 그러나 이 멍청한 신병은 여전히 "가까이 오면 쏜다!" 따위의 경거망동(실탄도 없는 빈총을)만을 반복하였으니 이 무슨 황당무계의 시추에이션이 아니었겠는가.
암구호를 상실한 '나사 빠진' 신병임을 확인한 그 장교는 나를 마치 장마철에 먼지 나듯 그렇게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새끼, 암구호도 잊어버려? 넌 전시였음 즉결 처형감이었어!" 장교는 병사를 때리는 데도 나름의 노하우가 있는지 여하튼 얼추 스무 대 가까이를 맞았는데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에 다름 아니었다.
"시정하겠습니다!" "똑바로 해, 시꺄." 그 장교가 가고 난 뒤로도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전에 비해 군대에서의 구타는 많이 사라졌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현재도 구타와 그 비슷한 따위로 말미암아 군인이 자살하는 어두운 뉴스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어 유감이다.
신병교육대를 출소한 뒤 복무한 방위병 근무에서의 애로사항, 예컨대 여전했던 고참과 상관의 구타 따위는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다. 다만 끝으로 한 마디 더 하고자 하는 말은 사람은 짐승이 아닌 까닭으로 병영에서의 구타는 정말이지 시급히 사라져야 마땅한 것이란 주장이다.
아무리 군대와 병영에선 고작 대못박이(큰못이 뚫지 못하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아주 둔하고 어리석어서 몇 번이나 가르쳐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와 가르친사위(창조성이 없이 무엇이든지 남이 가르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일망정 그도 집에 가면 귀한 자식이자 대(代)를 이을 천근만근과도 같은 소중한 아들이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 공모 '병영구타의 추억' 응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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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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