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피해 차량의 뒷 문짝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솔직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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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내와 아이들이 비를 맞으며 서 있는 곳에 다가가 보니 낯선 30대 중반의 우산 쓴 여자가 그 앞에서 온갖 인상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 순간, 뭐 죽을 죄를 졌다고 저러고 있나 싶어 나는 "왜 그래? 어딘데..." 라며 풀죽어 있는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피해 차량의 뒷 문짝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솔직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라는 거야?"라며 재차 아내에게 묻자, 옆에서 지켜보던 우산 쓴 차주가 불쾌한 인상을 쓰더니 손가락을 짚어 그 파손 부위를 가리켰다.
미안하다. 나에게 정말 이기적인 놈이라고 비난해도 내 솔직한 느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가 가리킨 위치에 무슨 흔적이 보이기는 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봐야 보일 정도로 아주 미세한 '흰 자국' 이었다. 알고 보니 아이가 간격 좁은 주차장에서 부주의한 실수로 옆 차의 문을 살짝 '콕' 찍은 것이었다.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 미세한 정도가 '용납할 수 없는 피해'였다는 정서적 차이가 컸던 것 같다.
어쩌랴. 나는 피해 사실을 확인한 후 일단 비 맞고 서 있는 처자식에게 "이제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아이들 데리고 그만 식당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식당에 들어간 처자식을 확인한 후 돌아서서 피해 차주를 향했다. 그리고 최대한 정중하게, 그리고 정말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가 부주의해서 실수를 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될까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피해 차주는 더욱 짜증난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며 "아니, 저 차 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게 뭐예요? 애를 잘 단속하셔야지, 냉면 맛있게 먹고 나왔더니 정말 재수가 없어서..."라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첫 마디부터 강한 어조로 짜증을 내는 낯선 여자. 물론 자기는 피해자이고 나는 가해자 아버지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좀 당황스러웠다.
저 정도 피해 사실을 가지고 저렇게까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낼 수 있나 싶었다. 더구나 비가 오는 지금, 자기는 우산을 쓰고 있고 상대방은 그 비를 쫄딱 맞아가며 정말 미안하다고 비굴한 모드로 말하는데, 마치 아랫 사람이나 하인 다루듯 당당한 태도가 순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또 어쩌랴. 일단 내가 가해자 측이니 피해자 마음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다시 재차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럼 보험을 불러서 차량을 수리하도록 하면 어떨까요?"라며 빨리 수습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피해자측 여자는 의외의 답변을 했다.
"뭐 굳이 보험까지 부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그냥 뭐 해결하죠." 실수였다. 나는 그 여자의 뜻을 잘못 이해했다. 내 진심이 그제야 전달되었다고 생각했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냐?"며 재차 물었다. 그러자 여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뭐, 차에 흔적만 좀 지워주시고..."라며 뒷말을 삼켰다. 그 삼킨 뒷말을 이해했어야 했는데 나는 흔적만 지워달라는 말에 방점을 찍었다.
그랬다. 이런 나의 태도가 그녀 눈에는 뻔뻔해 보였던 것 같다. 나는 피해 차량에 남은 그 미세한 흔적을 지운다며, 차에서 흔적 지우는 차량용품을 꺼내 정성껏 닦고 또 닦았다. 나는 여전히 우산도 없이 비를 맞으며 그렇게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피해자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 흔적이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판단하고 돌아본 그 여자의 표정은. 놀랐다. 아까 전보다 더 굳어져 있는 것 아닌가.
2주 후 듣게된 뒤처리 결과... '헐'나는 또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조심스럽게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이게 뭐냐? 새 차에 왜 그런 이상한 것을 바르는 거냐?"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차량 소유자라면 누구나 다 쓰는 평범한 차량 흠집 제거제를 사용한 것인데 '이상한 것'이라는 표현을 들으니 솔직히 황당했다. 그때 알았다. 이게 이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피해자의 속마음은 이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결국 나는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는 판단을 하고 "그럼 보험사를 불러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네요"라고 말하고 보험사에 출동을 요청했다. 잠시 후 도착한 보험사 직원은 상황 파악 후 나에게 피해 차주와 협의하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켜 달라고 요구했다. 잠시 후 나를 찾아온 보험사 직원은 "피해자 분이 흠집은 이제 됐고 피해 보상으로 돈을 달라고 하는데 어떡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랬구나. 돈이었구나" 싶었다. 나는 내가 잘못 읽은 그녀의 메시지가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나는 나대로 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럼 처음부터 정확히 말을 하지... 괜히 그 비를 쫄딱 맞아가며 비굴하게 행동했구나 싶었다. 문제 해결을 한답시고 피해 차량을 닦고 또 닦던 내 모습이 오버랩되며 나는 치욕스러운 느낌까지 들기 시작했다. 나는 보험사 직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오. 저는 그 사람에게 돈 주고 해결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그냥 보험으로 처리해 주세요."그러자 보험사 직원은 "차량 수리 비용이 50만 원 이상이면 향후 3년간 보험료 할인도 되지 않아 오히려 손해가 더 클 수 있으니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 해서요"라고 재차 권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 차량이 파손된 것도 아닌데 수리 비용이 50만 원 이상 나올까요? 그리고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저는 지금 와서 저 사람에게 돈 줘가며 합의할 의사가 없어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처음부터 합의금을 달라고 하지, 마치 큰 죄인처럼 우리 가족 전부를 대하고 또 그 비를 다 맞아가며 다 닦고 나니까 뭐라고요? 차라리 그 돈을 보험사에 주면 줬지 따로 줄 생각이 없으니 그냥 보험으로 처리해 주세요."결국 사건은 보험으로 처리하기로 하고 나는 그 일을 잊기로 했다. 그리고 약 2주가 지나갔나? 어느 날 보험사에서 전화로 그 뒤처리 결과를 알려줬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확인 결과, 피해 차주는 문제의 차량 뒷 문짝을 통째로 갈았다고 한다. 그 수리 기간 동안엔 렌트 차량을 이용했으며 피해 보상에 따른 비용도 정산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고 처리 비용이 50만 원 기준을 훌쩍 넘었다는 통보였다.
그야말로 '헐'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미 내가 다 닦아서 없어진 흔적이었다. 설령 그 흔적이 남았다 쳐도 수리 비용 50만 원은 절대 넘지 못하리라 자신했던 나로서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나는 분했다. 정말 화가 났다. '가벼운 교통사고 한번 나면 횡재'라는 우리 사회 일각의 속된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낀 사례였다.
그러면서 나는 누군지도 모를 그녀에 대한 복수를 생각했다. "오냐. 나도 차량 사고 한번 당해보자." 너무 분한 마음에 나는 이런 생각까지 하며 그때 그 악몽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2년여가 지나가던 2014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마침내 나에게도 차량 사고가 났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나만의 '복수', 믿거나 말거나국회에서 근무하던 지난 2014년 8월 여름 어느 날, 퇴근하기 위해 지하 주차장에 세워 놓은 내 차에 가 보니 전면 유리 창 밑에 포스트잇 한 장이 붙어 있는 것 아닌가. '뭐지' 싶어 떼어 읽어보니 거기에 써있는 글은 이랬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차를 하다가 실수로 선생님의 차 범퍼를 그만 긁었습니다. 전화를 드렸는데 바쁘신지 통화가 안 되어 여기에 메모를 남깁니다. 연락주시면 고맙겠습니다. 010-1234-××××"가해자가 남긴 메모를 보고 나는 내 차를 둘러봤다. 확연하게 보이는 시커먼 자국이 차량 앞 범퍼에 남았다. 나는 순간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그때 그 주차장 사건이 떠올랐다. 마침내 내가 그토록 기다렸던 '복수'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사고를 당해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저 깊은 속에서 솟구치는 '카타르시스적인' 희열에 몸부림쳤다.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순간인가. 그 날의 치욕, 그 모욕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마침내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
자. 이제 어찌 할 것인가. 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머릿속에 떠올리며 전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전화기 저편에서 가해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의 나처럼 매우 정중하고 또 미안해 하는 가해자의 전화 응대였다. 나는 "제가 차량 피해자인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가해자는 또 그때의 나처럼 피해자의 처분만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전날의 차량 가해자와 함께 한 식당에 마주 앉아 점심을 먹었다. 사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도 가해자는 "제가 밥이라도 살 수 있게 해 달라"며 오히려 사정했기 때문이다. 그후 식사 시간은 내내 유쾌했다. 행복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웃음 소리가 내내 이어졌다. 그러면서 그 식사 말미에 가해자가 나에게 물었다.
"사실 처음에 전화 통화할 때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더구나 해결 방안으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할 테니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셔서 도대체 무슨 요구를 하려고 이러시나 싶어 속으로 더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세 가지가 첫째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봐 준다.' 두 번째가 '피해자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후 그냥 봐 준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나중에 나도 다른 사람 봐주기로 약속하고 이번 일은 그냥 봐 준다'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셔서 놀랐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왜 이런 요구를 하신 건가요? 사실 놀랐습니다."가해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에게 지난 2년 전 여름, 내가 겪은 그 일을 말해줬다. 그날 내가 당한 정신적 수모와 상처에 대해 말했다. 조그마한 어떤 실수에 대해 그렇게까지 사람이 사람에게 야박하게, 각박하게 대할 수 있는지 상심과 회의감이 컸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잃은 누군가에게 나만의 복수를 꿈꿨다고 말해줬다.
그래서 나는 가해자에게 말했다.
"차량 범퍼는 어차피 소모품이니 제가 페인트 사서 살짝 칠하면 되니 별 문제 없습니다. 다만 저도 진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번 일로 정말 저에게 고맙다 생각하시면 선생님도 앞으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배려를 한번만 베풀어 주세요. 그렇게 해주시면 그게 저에 대한 진짜 피해 보상입니다." 그날, 가해자는 따뜻한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그날 점심 밥값도 솔직히 내가 내고 싶었으나 "이건 정말 안 된다"며 화까지 내는 가해자에게 밀려 결국 점심은 얻어먹고 말았다. 하지만 식당을 벗어나 사무실로 복귀하는 그 길에서 나는 웃었다. 행복했다. 내가 생각한 복수는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그 행복한 기분을 누가 알까. 믿거나 말거나. 나는 '거짓말 같은 복수극'을 선택한 내 결정이 자랑스럽다. 후회없다. 이 행복한 기분을 함께 나누고 싶다. '사람을 사람답게'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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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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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범퍼 긁혔는데 웃음이...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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