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만에 수면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마을'

[강원도여행] 가뭄으로 '바닥' 드러난 횡성호의 봄 풍경

등록 2015.04.11 21:17수정 2015.04.13 14:37
1
원고료로 응원
 오랜 가뭄으로 수위가 줄어 들판 일부 바닥이 드러난 횡성호.
오랜 가뭄으로 수위가 줄어 들판 일부 바닥이 드러난 횡성호.성낙선

계속되는 가뭄에 횡성호가 산자락에서부터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2000년에 횡성댐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댐이 생기는 바람에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들에겐 지금이 다시 한 번 더 고향 땅을 밟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실향민이 아닌 사람들은 그곳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옛날 실향민들이 살았던 흔적을 찾아볼 수도 있다.

최근에 봄비가 내리면서, 호수의 수위가 조금 높아지긴 했다. 그래도 예전의 저수율을 회복하는 데는 크게 모자라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계속 될지는 알 수 없다. 누구에게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호수가 그저 황량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닥이 드러난 횡성호는 그렇게 쓸쓸해 보이지 않았다. 횡성호의 저수율이 이렇게까지 낮아진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이 횡성호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수위가 줄면서 마치 늪처럼 변한 횡성호 호수 바닥.
수위가 줄면서 마치 늪처럼 변한 횡성호 호수 바닥.성낙선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마을의 들판과 도로

호수 바닥이 드러나면서, 예전에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일구던 밭과 논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경계를 만들던 둑이 허물어져 내리는 바람에 윤곽이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다. 다만 낮은 산자락에 층층이 자리를 잡고 있는 땅들이 그곳이 예전에는 밭이나 논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댐이 건설되고 마을이 온통 물에 잠겼어도, 사람들이 살던 흔적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을 가로지르던 2차선 도로는 이전에 그 위로 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니던 모습 그대로다. 아스팔트가 검은 빛을 잃고 잿빛에 가까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 말고, 도로라는 형태는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물 위로 드러난 도로. 저 끝으로 다시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
물 위로 드러난 도로. 저 끝으로 다시 도로가 이어지고 있다.성낙선

도로 한가운데 길게 줄을 그은 중앙선마저 비교적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금 당장 이 도로 위로 차들이 지나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호수에 물이 가득했을 때는 단지 이곳에 도로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도로가 이렇게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낼 줄 누가 알았을까?

사람들이 거주하던 집터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횡성댐으로 호수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 여러 개의 마을이 있었다. 호수 수위가 낮아지면서, 예전에 그곳에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들판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가뭄이 횡성호에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또 다른 풍경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뜻하지 않았던 일이다.


 실향민들이 일궜을 밭과 논. 자세히 보면, 일정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다.
실향민들이 일궜을 밭과 논. 자세히 보면, 일정한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 걸 알 수 있다.성낙선

호수에 물이 차면 다시 사라져 버릴 풍경들

가뭄이 계속되면서, 횡성호 호수 바닥에 이전에 사라지고 없던 길들이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다. 15년 만에 모습을 드러난 땅 위로 사람들이 다시 길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호숫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인간의 본능이 이런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세상에 호수 바닥에 만들어지는 길처럼 일시적인 게 또 있을까. 이 길들은 호수에 물이 차기 시작하면, 다시 물속으로 사라질 운명이다.


횡성호를 여행하려면 둘레길을 이용해야 한다. 횡성호 둘레길은 모두 6개 코스로 나뉜다. 모두 호수를 중심으로 해서 생긴 길이다. 호수 둘레길이라고 해서, 모두 호숫가를 따라 도는 길은 아니다. 그 길 중 일부는 호숫가에서 떨어져서 산길을 걸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다섯 개의 길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길이 5코스다. 이 길은 둘레길 6개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할 수 있다.

 횡성호 둘레길 풍경.
횡성호 둘레길 풍경.성낙선

5코스는 특히 길이 대부분 호숫가에 바짝 붙어 있는 데다, 이리저리 굽어 도는 까닭에 횡성호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다채로운 풍경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코스 길이가 다른 코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게 조금 아쉽다. 그래도 '횡성호 둘레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은 모두 이 길 위에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흙길이다. 길의 절반은 평지나 다름이 없다. 평탄한 길이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만들어졌다. 이 길 위로 호수를 관리하는 차들이 지나다닌다. 그렇다고 일상적으로 차가 지나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좁은 오솔길이다. 여행은 '망향의 동산'에서 시작한다.

 횡성호 둘레길에 핀 진달래.
횡성호 둘레길에 핀 진달래.성낙선

실향민들의 손때가 묻은 농기구, 살림 도구들

망향의 동산은 횡성댐이 생기면서 마을을 떠나야 했던 실향민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보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실향민들은 이곳에 '화성의 옛터'라는 이름의 전시관을 만들고 그 안에 과거 자신들이 직접 사용했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 물건들은 농기구에서부터 문짝이 달린 텔레비전까지, 모두 마을 주민들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다.

전시관은 '민속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규모만 작을 뿐이다. 전시 물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렇지만 과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마을이 수몰되기 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엿보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전시장 한쪽 귀퉁이에 여러 권의 졸업 앨범이 보관돼 있다. 그 안에 수십 년에 걸쳐 이곳에서 '아이들'이 뛰놀고 공부하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실향민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는 화성의 옛터.
실향민들의 손때 묻은 물건들을 전시하고 있는 화성의 옛터.성낙선

졸업 앨범 속 아이들 중에 방문객이 기억하는 얼굴은 하나도 없다. 모두 낯선 얼굴들뿐이다. 그런데도 앨범 속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들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코끝이 아려오는 걸 피할 수 없다. 요즘 농촌 마을에서는 이런 앨범을 만들려고 해도 도저히 만들 수가 없다. 아이들이 부족해, 학교마저 문을 닫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전시관 앞마당에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석탑 두 기가 우뚝 서 있다.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들이다. 같은 돌덩이라도 이 석탑들은 통일신라 이래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유물이라는 이유로, '수몰'이라는 큰 위기에서 용케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제 이 석탑들은 '화성'이라는 지역의 사라진 땅과 고향을 상징하는 또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1998년 수몰지에서 옮겨와 망향의 동산에 새로 거처를 정한 삼층석탑.
1998년 수몰지에서 옮겨와 망향의 동산에 새로 거처를 정한 삼층석탑.성낙선

이곳에서 '고향'을 떠난 건 오로지 사람들뿐

전시관 근처 공터에서는 실향민들끼리 매년 한 차례씩 '망향제'를 지낸다. 실향민들이 매년 이곳에 찾는 이유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없는 고향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렇다고 그들의 고향이 모두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은 옛날에 보던 모습 그대로다. 그 산이 이제는 마을이 아닌 호수를 둘러싸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 그랬듯이 호수를 둘러싼 산에도 어김없이 진달래꽃이 피고 있다. 피어나는 건 진달래뿐만이 아니다. 둘레길 주변으로,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야생화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들이 이곳을 인간이 살지 않는 새로운 땅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 이 땅에서 '고향'을 잃고 떠난 건, 무엇인가에 늘 쫓기듯이 살아가는 인간들뿐이다.

 횡성호 둘레길, 좁은 오솔길.
횡성호 둘레길, 좁은 오솔길.성낙선

사람이 떠나고 없는 자리에 다양한 종류의 동식물들이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그날, 사람들은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부득이 고향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날로 우리들의 고향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고향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고향은 단지 주인만 바뀌었을 뿐이다.

길을 걷다가 어디선가 풀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봤더니, 멀리서 고라니 한 마리가 무성한 풀밭을 벗어나 메마른 호수 바닥으로 뛰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새 이 땅의 주인이 된 고라니다. 이곳은 이제,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꽃과 나무들의 땅이다. 그리고 풀숲을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고라니들의 고향이다. 바닥이 드러난 횡성호, 수몰지의 풍경이 그렇게 황량하고 쓸쓸하게만 보이지 않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횡성호 둘레길 5코스가 시작되는 곳.
횡성호 둘레길 5코스가 시작되는 곳.성낙선

#횡성호 #횡성댐 #둘레길 #화성의 옛터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징역1년·집유2년' 이재명 "이것도 현대사의 한 장면 될 것"
  2. 2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의사 아빠가 죽은 딸의 심장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
  3. 3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남편 술주정도 견뎠는데, 집 물려줄 거라 믿었던 시댁의 배신
  4. 4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