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월4일자 문화면에 실린 '기자의 눈'
어찌 보면 해프닝성의 방송기자단 투표사태(?)를 증폭시킨 것은 사실관계를 보도한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신문> 기사에 대한 <동아일보>의 반박성 칼럼이다.
지난 4일자 <동아일보> 방송면의 '기자의 눈- 비밀투표와 사상검열'에서 기자는 "비실명을 전제로 한 응답내용을 추적폭로한 일부신문의 행위가 '사상검열'이자 '정신적 도청행위'라고 물아 붙였다.
그러면서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무시하는 매체비평도 사라져야 한다"고 일갈했다.
말문이 막힐 뿐이다. 이 기자는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의 기사가 몹시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렇지, '사라져야 한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다니. 오버도 이런 오버가 없고 해도 너무했다는 생각이다. 시정잡배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자신과 견해가 다르면 꼴보기 싫으니 없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막가파식 인신공격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조차 무시한 조폭적 발상 아닌가.
매체비평, 아니 글쓰기의 기본이 안 돼있는 이 칼럼에 대해 사실 할 말은 별로 없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과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이 가능하겠는가. 그러나 기자가 글을 쓸 때는 정확하게 알고 써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에서 한마디만 하겠다.
알면서도 그렇게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칼럼은 비밀투표와 사상검열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비밀투표의 취지는 권력자들의 간섭과 위해로부터 힘이 약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투표행위를 보장하자는 것이다. 방송프로그램의 좋고 나쁨을 그것도 순서를 매겨서, 멋대로 재단하는 기자단이 힘없는 일반시민들과 같은가.
또 '사상검열'이라는 말은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다. 이 말에는 으시시하면서도 머리칼을 쭈삣하게 서게 만드는 분위기가 서려있다. 사람의 생각할 자유를 통제하겠다는 뜻이며 감금, 고문, 학살 등등이 연상되는 단어인 것이다.
사상검열이란 권력자들이 반대의견을 억누르기 위해 자주 써먹었던 수법으로 중세 때 교권에 도전하는 신흥세력에 대한 마녀사냥이나 중국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가깝게는 2차대전 후 미국 지식인 사회를 황폐화시킨 매카시즘 열풍이나 옛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여기에 해당된다. 즉 극우나 극좌의 입장만이 허용되는 폐쇄적인 독재사회에서 반대자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사회적 기제라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장집 교수가 지난 98년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임명됐을 때 <조선일보>에 나온 일련의 음해성 기사와 칼럼을 두고 사상검열이라면서 일단의 지식인과 네티즌들이 격렬하게 반발했던 일로 유명해진 단어다.
이것은 또 다른 언어폭력이다. <오마이뉴스>와 <한겨레>에서 언제 방송기자단의 사상을 검열했다는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과정을 취재해서 보도하는 것이 사상검열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그러니 <동아일보> 등 일부 거대신문들이 (사실 이 부분에 관한 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대해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 정도다) 언론권력이요 조폭언론이라는 말을 듣는 것 아닌가.
이 칼럼은 '미디어비평'도 크게 오해하고 있다. 칼럼에서는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자기비판보다 특정 언론사들에 대한 도식적 편가르기식 비판으로 편향성을 드러냈다"고 썼다. 매체비평을 이렇게 오해할 수도 있는가.
필자는 지난 해 초 <미디어오늘>을 통해 당시 족벌신문들의 '미디어비평'에 대한 공격논리를 유형화해 본적이 있다. 그 가운데 일부분을 인용하면 이렇다.
"첫째가 안하무인형이다. 소위 방송은 정권으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기 때문에 제대로 된 매체비평을 할 수 없다는 논리다. 방송위원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하고 이들 이사진이 사장을 뽑기 때문에 정권에서 시킨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반박하겠다. 그런 점이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는 정권측에서 내정한 인사대신 시민단체 대표였던 김중배씨를 사장으로 임명했다.
더 나아가 족벌신문들은 어떤가? 정권으로부터는 독립돼있다 치고 자본으로부터는 어떤가? 사주들에 의한 편집권 간섭이 정말 없는가?
둘째가 후안무치 또는 적반하장형이다. 자기반성과 자기비판부터 하라는 것이다. 이같은 논리에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자신들은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는 자기비판을 다른 매체더러 하라고? 민족지라고 자처하는 <조선>과 <동아일보>가 언제 친일행적에 대해 사과 한마디했던가? 75년 동아투위, 조선투위 사태 때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기자들을 내쫓은 데 대해서는 어떤가."
<동아일보>의 칼럼은 전형적인 두 번째 유형의 논리에 속하는 것이다.
3. 교훈과 해법은 무엇인가
현재의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는 비판받아 마땅한 프로그램들도 부지기수로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로 연예오락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시청률 지상주의에 매몰돼 선정적이고 폭력 지향적인 관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은 달게 받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프로그램들에 대한 사회적 견제는 활성화될수록 좋으며 실제로도 활발하다. 언론단체와 시민운동단체들이 나쁜 프로그램으로 선정해 사회적 망신을 주고 있기도 하다.
방송기자단과 시민단체들의 좋은 프로그램, 나쁜 프로그램 선정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라는 반문은 하지 말기 바란다. 시민단체들이 선정할 때는 전문가들로 심사위원회를 구성해서 치열한 격론을 거친 끝에 분명한 선정이유를 덧붙여 발표한다. 따라서 프로그램 제작자들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저 제작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볼멘 소리를 할지언정.
이에 반해 방송기자단은 선정기준과 이유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과정도 없이 참가자가 몇 명이 됐든 일방적으로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보도해 버리는 것이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뽑아서 발표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인가? 무책임의 극치요, 일종의 횡포로 볼 수밖에 없다.
제작진들의 자성을 요구하고 더 나은 프로그램을 만들게 하기 위한 의도라면 당연히 선정 배경을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방송기자단의 이번 선정작업은 의도했든 안했든 자신들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결론부분에 도달했다.
이번 방송기자단의 좋은 또는 나쁜 프로그램 선정작업이 주는 교훈과 해법은 무엇인가. 우선 방송 출입기자단의 자기과시용 선정작업은 그만 둘 때가 됐다. 자신들의 존재를 뽐내기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합리적 설명이 불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은 앞서 누누이 살펴봤다. 문제가 있는 프로그램이면 기자단이라는 외피 속에 숨지 말고 기명기사를 통해 정면으로 따끔하게 비판하라.
둘째 근본적으로 실체가 불분명한 방송 출입기자단이라는 단체는 차제에 해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단체를 대표하는 단장이나 총무, 간사도 없는 형해만 남은 기자단을 계속 존속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또 방송을 담당하는 젊은 기자들은 잘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방송기자단의 독선적인 행태는 기자단의 탄생배경과 그 취지에서 크게 어긋나 있다. 군사독재 시절, 기자 개인이 정보공개를 기피하는 출입처를 상대로 싸우기 힘들었기 때문에 자구수단으로 나온 것이 바로 기자단이다.
혼자서 하기 힘든 정보청구를 집단의 힘으로 하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고 정보공개와 관련된 부당한 요구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기자단을 활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긴 기자단이 요즘은 기득권을 가진 언론들의 보호막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작년 초 인천공항 개항시 <오마이뉴스> 기자가 등록이 안 돼있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애초의 순기능은 사라지고 신생언론들의 진입장벽만 높이고 있는 기자단이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방송사를 취재하는데 집단의 힘을 빌려야 할 정도로 취재환경이 열악한가. 마침 청와대를 비롯해 배타적으로 정보를 독점하는 기자단의 폐해가 심각한 곳에서 기자단 해체 등이 거론되고 있는 바 방송기자단도 해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방송사와 방송인들, 특히 PD들이 분발해야 한다.
먼저 PD들은 방송기자단의 프로그램 선정작업에 대해 왜 항의 한마디 못 하는가? 비단 시사교양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드라마, 오락 프로그램 PD들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호평을 받든 혹평을 받든 방송 프로그램은 제작진이 주어진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횡포에 가까운 방송기자단의 프로그램 서열 매기기에 목소리를 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시 말 못할 속사정이라도 있는가.
이와 함께 KBS와 MBC, SBS 등 지상파 방송사들도 기자실을 철폐할 때가 됐다. 신문사에도 방송사 기자들을 위한 기자실이 있는가. 같은 언론사끼리 신문사에는 없는 기자실이 방송사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말이다.
이렇게 불공정한 게임이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는데는 방송사, 또는 방송인들의 신문 또는 신문기자들에 대한 전통적인 저자세가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아직도 방송사의 일부 고급간부들의 경우 신문의 비판기사 한 줄에 일희일비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배경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역대 군사독재정권들은 영향력이 막강한 방송매체의 편성과 보도, 인사를 떡 주무르듯 해 왔고 그 결과 방송은 오랜 기간 여권매체, 관제언론으로 기능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자. 지난 1975년의 동아투위와 조선투위, 그리고 80년 서울의 봄 시절 반짝했던 80년 언론사들의 자유언론수호투쟁 이래 신문과 방송보도 사이에 큰 틀에서 얼마나 대단한 차이가 있는가. 오히려 요즈음은 방송들이 일부 족벌신문보다 더욱 공정한 보도, 좋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시민단체들로부터 이구동성으로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번 방송기자단의 방송 프로그램 선정이후 일어난 언론사간의 일련의 공방소동이 전화위복의 계기로 쓰여졌으면 하는 생각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동안 관행화 됐던 비정상적이고 왜곡된 방송과 신문의 관계가 바로 잡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몰상식이 상식으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행세하는 구시대적 작태는 이제 끝낼 때가 되지 않았을까?
덧붙이는 글 | 최용익 기자는 MBC 미디어비평 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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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사엔 없는 기자실, 방송사 왜있나 방송과 신문의 '제자리찾기'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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