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고구마 맛은 처음이야"

시누이와 올케가 고구마 캐던 날

등록 2005.09.16 15:54수정 2005.09.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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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누님이 모처럼 고향에 함께 가자고 제의했다. 선산의 부모님을 찾아 뵌지도 오래 된 듯하고, 그리운 고향 산천도 동생과 함께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뜻하지 않은 병원치료 등 그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는 누님의 제의이기에 선뜻 동행하기로 했다. 시골 출신인 아내 역시 고향에 간다는데 마다할 리 없다. 더구나 아내의 친정은 내 고향 마을과 인접해 있으니, 남편의 고향 방문이야말로 자동적인(?) '친정나들이'가 되는 셈이다.


남편의 성묘길이 아내에게는 '친정 나들이'

아내는 며칠 전에도 고추를 따기 위해 친정에 다녀왔다. 시골에서 홀로 사시는 장모님은 농사일을 예전처럼 거두지 못하신다. 팔순 노인으로서 힘든 전답 일을 거두기에는 근력이 부칠 뿐 아니라, 지난해부터는 요통에 관절염까지 겹쳐 병원 출입이 잦다.

뿐만 아니라 노인이 혼자 장터거리에 나갔다가 빈혈로 쓰러져 보건소 신세를 진 적이 있는데도 여전히 시골 생활이 편하다고 고집하신다. 그러니 아내의 친정 나들이는 단순히 시골여행이 목적이 아니라 노인 보살핌과 전답을 돌보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골 여행은 누님의 제의로 이루어졌으나, 내 자동차로 왔으므로 누님은 부모님 성묘 후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처가에까지 동행하게 됐다. 아내가 말했다.

"친정에 온 김에 고구마 좀 캐야겠네."

그러자 누님은 그다지 반기는 표정이 아니었다. 왜 아니 그런가. 그동안 병원 치료 등으로 허약해진 몸에다가 아직 컨디션이 완전 회복이 안 된 상태이고, 날씨마저 30도를 넘는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니, 밭 일을 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가 온 뒤의 밭이라 질척거려 구두를 신고 이곳에 온 누님으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었다. 옷차림 역시 호미를 들고 밭 일을 하기에는 부적절해 보였다. 그러나 누님이 누구인가. 농촌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농사일에는 이력이 난 누님이 아닌가.

누님도 어릴 때부터 '농사꾼의 딸'로 성장


<칠갑산>이라는 유행가 가사에 등장하는 '콩밭 매는 아낙네'가 바로 우리 누님의 예전 모습이라고 나는 늘 도시 사람들에게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누님과 아내의 '고구마 밭' 풍경 - 고향의 고구마 밭에 들어서면 가을의 풍요를 느낀다
누님과 아내의 '고구마 밭' 풍경 - 고향의 고구마 밭에 들어서면 가을의 풍요를 느낀다윤승원
"준섭이 엄마! 고구마를 얼마나 캘 거야? 이 밭의 고구마를 다 캘 셈이야?"

누님이 아내에게 묻자, 아내는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아직 수확철이라 하기엔 이르니 오늘은 한 고랑만 캐지요. 고구마 굵기를 보면 아직 덜 여문 것 같거든요."

그러자 누님은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고구마 줄기부터 걷어내기 시작했다. 미리 작심하고 호미를 챙겨온 아내는 고구마를 부지런히 캤고, 누님은 '줄기걷기'와 '자루에 고구마 담기' 등 진흙이 옷에 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수확했다.

시누이와 올케의 '고구마 밭 일'이 정겨워 보여

이 동생은 누님과 아내의 이런 넉넉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수확의 정경을 그저 바라다보기만 해도 좋았다. 환갑이 넘은 누님과 오십대 중반의 아내이다. 이제 어느덧 할머니 연륜으로 접어 든 시누이와 올케가 이렇게 고향의 고구마 밭에서 흙향기 맡으며 수확의 기쁨을 함께 나누니, 그지 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누님은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아내는 호미질하고...누님과 아내가 이렇게 밭에서 일을 하기는 처음이다.
누님은 고구마 줄기를 걷어내고 아내는 호미질하고...누님과 아내가 이렇게 밭에서 일을 하기는 처음이다.윤승원
여기서 캔 고구마는 시장에서 흔히 보던 그런 고구마가 아니었다. 빛깔은 진홍색을 띠고 있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청양의 '호박고구마'인 것이다. 깎아 놓으면 알록달록한 색깔을 띠고, 수분과 당도도 풍부하여 과일 대신 후식으로 먹어도 좋다는 개량종 고구마이다. 지난 6월 아내가 혼자 시골에 가 그 세찬 비를 맞으며 심고 온 고구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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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마 줄기 심으러 친정에 가요"

'맛 보기'로 한 자루만 캔다고 약속하더니, 아내와 누님은 벌써 두 고랑째 고구마 줄기를 뽑아내고 있었다.

"한 고랑만 캐면 동생과 내가 어떻게 두 자루씩 나눠 갖겠어. 적어도 두 고랑은 캐야 이 누나 몫도 있을 것 아냐?"

이제 누님이 고구마 빛깔을 보면서 감탄했다.

색깔과 맛이 독특한 내 고향 '청양 고구마' - 일명 '호박 고구마'라 불리는 내 고향 청양 고구마는 토질이 좋아서인지 맛도 자랑할만 하다
색깔과 맛이 독특한 내 고향 '청양 고구마' - 일명 '호박 고구마'라 불리는 내 고향 청양 고구마는 토질이 좋아서인지 맛도 자랑할만 하다윤승원
그랬다. 고구마는 늦가을 무렵에 캐야 굵기가 실한데도 올해는 철이 이른지, 벌써부터 보기 좋게 모양을 드러내는 것을 보니, 더 캐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작년에는 이렇게 많은 고구마를 수확하여 동네 잔치를 벌였다"고 아내가 말했다.

공짜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준 것이 아니라, 동네 골목에서 헐값으로 팔았더니, 한 트럭분의 고구마가 1시간만에 동이 났다고 아내가 자랑했다. 그 돈으로는 시골 친정 어머니 약을 지어드렸다고 한다. 나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고구마 수확을 아내에게 예약(?)해 놓은 누님

누님을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집에 돌아온 지, 두 시간 남짓 되었을까? 전화가 울린다. 누님의 전화였다. 아내는 전화를 받으면서 시종일관 입가에 웃음을 거두지 못했다. 무슨 전화이기에 그러냐고 물으니, 아내가 누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지금 마악 고구마를 쪄 놓고 온 식구가 둘러 앉아 먹고 있는데, 너무 달고, 포슬포슬하고 맛이 있어서 식구들이 모두 이런 고구마는 처음 먹어 본다고 하더라. 늦가을에 본격적인 수확을 할 때는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캐오지 말고, 온 식구들을 단체로 데리고 가자."

말하자면 '고구마 캐기 예약'인 셈이다.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던 누님이 모처럼 고구마를 앞에 놓고 식구들과 기분 좋은 시간을 보냈다니, 동생으로서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어디 있는가. 청정지역인 내 고향의 무공해 고구마를 맛있게 드시고 건강이 좋아져서 앞으로 더욱 다복한 가정을 이루기를 기원해 보았다. 그날 밤 우리 내외도 고향에서 캐온 고구마를 쪄 놓고 먹으면서 그동안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과 흐뭇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글마당 '청촌수필'(cafe.daum.net/ysw2350)과 '국정브리핑'(news.go.kr) 등에도 올리고자 쓴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글마당 '청촌수필'(cafe.daum.net/ysw2350)과 '국정브리핑'(news.go.kr) 등에도 올리고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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