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줄기 심으러 친정에 가요"

출근길 아내와 말 다툼하던 날의 미안함

등록 2005.06.01 21:24수정 2005.06.02 20:0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늘은 조금 부끄럽고 미안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가벼운 말다툼을 했습니다. 으레 그렇듯 부부싸움의 발단은 하찮은 데서 출발합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아내는 출근하는 내게 "고구마 줄기를 심으러 시골(친정)에 간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일기예보에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오늘 같은 날 고구마 줄기를 심으면 아주 잘 자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거기(친정)가 어디 이웃 동네인가. 시외버스를 적어도 두세 번은 갈아타야 하는 멀고 먼 거리이고, 그나마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시간이 잘 맞지 않으면 네댓 시간은 족히 걸리는 곳인데, 승용차도 없이 어떻게 혼자 다녀오려고 그러는가. 그러지 말고 올해엔 내가 시장에 가서 고구마 몇 가마 사다가 줄 테니, 제발 사서 고생하지 마라"고 했지요.

시골에 즐겨가는 '아내의 항변'

그랬더니 아내는 발끈 화를 내면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왜 말려요!"라고 하더군요. 칠갑산의 고장 충청남도 청양군은 아내의 친정이기도 하지만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곳에는 현재 팔순의 장모님이 혼자 사시지요. 요즘 흔히 말하는 '독거노인'입니다.

지난해 고향에서 수확한 고구마 -  토질 좋은 고향 땅에서 자라서인지 맛과 빛깔 모두 자랑할 만하다.
지난해 고향에서 수확한 고구마 - 토질 좋은 고향 땅에서 자라서인지 맛과 빛깔 모두 자랑할 만하다.윤승원
아들, 딸이 도시에 살고 있지만, 장모님은 흙냄새 맡을 수 있는 시골생활이 더 좋다고 고집하시는 분이지요. 하지만 노인 혼자 사시면서 불편하고 외로운 것과 그런 부모님을 염려하는 자식들의 마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나 봅니다.


그런 까닭으로 아내는 홀로 사시는 친정어머니와 장거리 통화를 하기 시작하면 보통 한두 시간으론 부족합니다. 거의 매일 같이 통화를 하는 것 같은 데도 모녀지간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언제나 태산 같은 모양입니다.

보일러에 문제가 생겨도, 텔레비전이 잘 나오지 않아도, 장모님은 아내에게 전화로 상의하고 해결책을 찾기도 합니다.


그동안 거두시던 농사체도 몇 해 전부터는 모두 남에게 주고, 이제 전답이라고 해야 300여평 남짓한 고구마 밭과 집 앞의 손바닥만한 남새밭 정도가 고작이지요.

그나마 거기서 수확하는 것들도 거의 도시의 자식들에게로 가기 마련이지요. 그 중에서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고구마입니다.

지난해에도 아내는 틈틈이 시골을 왕래하면서 심어 가꾼 고구마를 놀랄 만큼 수확했습니다. 승용차 트렁크에 꽉 차게 싣고서도 남아 휴일을 이용해 몇 차례나 더 갖다 먹었습니다.

당도와 수분이 많아 후식으로 즐겨먹는 '내 고향 고구마'

다른 지역에 비해 이곳의 토양이 좋은지, 고구마가 유난히 달고 맛이 좋습니다. 저는 요즘도 후식으로 과일 대신 생고구마를 깎아 먹을 때가 많습니다. 변비에도 아주 뛰어난 효과가 있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습니다.

당도와 수분 함유량이 많아 사각사각 씹는 맛는 일품인 내 고향 '청양 고구마' - 지난해 수확한 고구마를 요즘도 후식으로 즐겨 먹고 있다.
당도와 수분 함유량이 많아 사각사각 씹는 맛는 일품인 내 고향 '청양 고구마' - 지난해 수확한 고구마를 요즘도 후식으로 즐겨 먹고 있다.윤승원

그 옛날 보리밥에 풋고추, 그리고 감자와 고구마를 주식처럼 먹던 나의 유년시절에는 요즘처럼 '웰빙음식'이란 말을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웰빙을 하지 않아도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성인병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보릿고개 시절은 저도 기억합니다. 방 안에 고구마 통가리를 만들어 놓고 간식으로, 혹은 점심 대용으로 즐겨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구마를 양재기 가득 쪄다 놓고 가족들이 삥 둘러 앉아 시원한 무 김치국과 함께 맛있게 먹던 그 시절의 추억이 이따금 그립고 아름답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이곳 대전에는 천둥과 함께 빗줄기가 제법 굵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내가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오히려 고마워하며 옷이 흥건히 젖도록 혼자 밭고랑에서 고구마 줄기를 열심히 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아침 출근길에 내가 던진 말이 미안하기만 합니다.

아내가 애써 심은 고구마 줄기가 오늘 비를 맞고 모쪼록 잘 자라 올 가을에는 지난해보다 더 풍성한 수확을 했으면 합니다. 시골에서 밤늦게 돌아올 아내에게 위로해줄 말 한 마디를 찾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필자의 글마당 '청촌수필'(cafe.daum.net/ysw2350)과 '국정브리핑'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필자의 글마당 '청촌수필'(cafe.daum.net/ysw2350)과 '국정브리핑'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재취업 유리하다는 자격증, 제가 도전해 따봤습니다
  2. 2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윤 대통령 10%대 추락...여당 지지자들, 손 놨다
  3. 3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보수 언론인도 우려한 윤석열 정부의 '위험한 도박'
  4. 4 세종대왕 초상화 그린 화가의 충격적 과거 세종대왕 초상화 그린 화가의 충격적 과거
  5. 5 윤 대통령 중도하차 "찬성" 58.3%-"반대" 31.1% 윤 대통령 중도하차 "찬성" 58.3%-"반대" 31.1%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