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강 사업의 그늘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는 '특종쟁이' 특종술 시민기자, 아니 김종술 시민기자
정대희
김종술 기자는 내게 '웬수'였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로 일하던 시절, 그 때문에 여러 번 고생했다. 출퇴근 시간이 안정적인 건 편집기자 생활의 장점 중 하나다. 오늘은 '칼퇴'해서 술이나 한잔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은 오후 5시 30분, 자주 김 기자의 글이 들어왔다.
편집창에 '김종술'이 보이면, 퇴근 임박 시간에 그의 이름을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 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오늘 나는 야근이란 말인가.''오랜만에 잡은 술 약속, 연기해야만 하는가.'일단, 칼퇴는 없던 일이 된다. 두 가지 때문이다. 우선, 그의 글에는 대개 '좋은 뉴스'가 있다. 그러면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편집해야만 한다. 제목, 사진 배치 등을 더 신경 써야 한다.
문제는 김 기자가 대개 금강 현장에서 급하게 글을 송고한다는 거다. 취재 현장에서 급하게 글을 송고했는데, 완벽하다? 그런 기자 세상에 없을 거다. 당연히 김 기자의 글은 거칠었다. 땀 냄새, 발 냄새, 물비린내 났고, 진흙탕과 모기떼가 그러졌다.
'좋은 뉴스인데, 글은 좀 거칠다.'성인군자가 아닌, 퇴근을 코앞에 둔 편집기자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글을 버릴 수도 없고, 야근도 하기 싫고.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고 최대한 친절한 목소리로 김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 기자님,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거 내일 편집해도 되죠?""빨리해야죠. 그거 빨리 나가야 하는 글입니다."내 마음도 모르고 태연하게 말하는 김 기자가 때로는 4대강 사업을 추진한 이명박 대통령만큼 얄밉게 보였다. 망가진 강에 사는 큰빗이끼벌레처럼 김종술 기자가 징글징글할 때도 있었다.
몇 해 전, 충남 공주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집이 있는 곳이자, 일터였다. 공주시에는 금강이 흐른다. 김 기자는 그곳에서 태어나 유년의 오랜 시간을 금강에서 보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가 나고 자란 땅이 아니었다. 김 기자에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다.
"금강이 너무 예뻐서 이사 왔어요."대답이 간단해서 당황했다. 대화가 끊겨 맥주 한 잔을 건넸다. 그가 정색했다.
"나 술 안 마셔요.""원래 못 드시는 거예요?""예전엔 마셨는데, 4대강 사업 이후부터 안 마셔요.""왜요? 이명박이 뭐라 해요?""금강이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때까지 안 마시기로 했어요."그는 자신의 다짐을 치장하거나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라면 "정신 똑바로 차려서 4대강 사업 문제 보도하려고요"라고 대답했을 텐데, 그는 그러질 않았다. 이후에도 그는 금강 현장에서 '거칠지만 뉴스가 있는 글'을 보냈고, 나는 '약속은 있지만 퇴근을 못 하는' 처지가 되어 그의 글을 편집했다.
수년간 김 기자는 내게 애증의 존재였다. 열심히, 꾸준히 현장을 지키는 그가 대단해 보이다가도, 나의 퇴근을 지연시킬 때면 더없이 얄미웠다. 이런 마음의 추가 '애정' 쪽으로 기울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언젠가 그의 강연을 듣는 자리에서였다. 그가 차분히 4대강 사업 이전의 금강 모습을 이야기했다.
"저는 아침마다 강변으로 산책을 나갔어요. 물안개가 피어 오르고, 가끔씩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아침 강의 모습은 정말 평화로웠습니다. 몇 시간씩 그런 강을 보면서 앉아 있었고, 별을 보면서 강변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아름다운 강이 망가지는 게 견딜 수가 없습니다."나는 김종술 기자를 바라봤지만, 내 눈엔 물안개 자욱한 아침강의 조용한 모습이 그려졌다. 기자의 의무감, 말도 안 되는 사업에 대한 분노 이전에, 그가 정말 금강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대상이 망가지는 것에 대한 슬픔, 그것이 김종술의 힘이었다.
조금씩 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게 됐다. 때로는 열등감도 느꼈다. 늘 현장을 지키며 기사를 쓰는, 게다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주제로 글을 쓰는 김 기자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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