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겠다는 의지는, 그의 고통을 자극적인 흥밋거리로만 만들 수 있다(자료사진).
Unsplash(Kushagra Ke)
이런 함정들을 피해 독자/시청자들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또 다른 고통을 줄이는 행동에 나서도록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이 책 또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다만, "분열하고 또 분열해서 더 이상 우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266쪽)조차 여전히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저자는 "누군가의 애도가 우리의 애도가 되고 결국 우리를 바꾸어놓을 수 있"(262쪽)기를 희망하면서 끊임없이 타인의 고통을 응시한다.
고통을 통해 소통하는 법
이 책을 읽은 뒤, 소설가 위화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 쓴 치과의사 시절의 일화가 생각났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정부가 사람들에게 무료 예방주사를 놔줬는데, 주사기를 반복해서 쓰다 보니 주삿바늘 끝이 구부러지기 일쑤였다. 위화가 어느 공장에서 예방주사를 놨을 때 "노동자들의 팔뚝에 들어간 주삿바늘은 모두 작은 살점을 달고 나왔다. 그들은 극심한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심할 때는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352쪽)
위화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이런 주사기는 이전에도 사용했고, 모든 주삿바늘이 끝이 구부러져 있겠거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날 유치원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놨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어린아이들은 살이 연해서 살점이 더 많이 달려 나왔고, 피도 더 많이 나왔다. 유치원은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그날 밤 위화는 주삿바늘의 구부러진 부분을 갈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기 전에 노동자들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노동자들과 아이들에게 예방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내 팔에 찔러보았더라면, 그리고 바늘에 달려 나온 나의 피와 살점을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이들이 고통으로 울부짖기 전에, 노동자들이 신음하기 전에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353쪽)
나도 고통에 내재한 윤리적 가능성을 믿는다. '우리'가 점차 흐릿해지는 시대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일은 지난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고 본다.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해도 어렴풋하게라도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일은 여전히 가능하며, 그런 시도야말로 무너져가는 '우리'라는 공동체를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가 고통의 구경꾼이 아니라 목격자이자 증언자, 나아가 연대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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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5기 인턴기자. 2015.4~2018.9 금속노조 활동가. 2019.12~2024.3 한겨레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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