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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힌 세상의 한 귀퉁이를 펼쳐 보여주는 책

원도 작가 <있었던 존재들>을 읽고

등록 2024.08.26 16:35수정 2024.08.26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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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출판으로 <경찰관 속으로>를 자신의 첫 책으로 펴냈던 원도 작가는 현직 경찰이다. <경찰관 속으로>는 경찰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없애줄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이자, 경찰관으로서 수많은 사건들을 겪으며 결코 지나칠 수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리고 원도 작가는 이 책에서 경찰관으로 일하며 부딪힌 한계와 경찰 조직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책 제목에 담긴 의미가 '경찰관 속으로'이기도 하지만 '경찰, 관 속으로'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a 책표지 있었던 존재들

책표지 있었던 존재들 ⓒ 세미콜론


현실적으로 독립출판물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원도는 <경찰관 속으로> 이후 <아무튼, 언니>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를 연달아 펴내며 '원도'라는 이름 두 글자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졌다. 그러나 작가는 <경찰관 속으로> 이후 경찰관의 삶을 밀접하게 다룬 책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4년 만에 그 다짐을 접고 <있었던 존재들>을 통애 경찰관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의 사사로운 경험이 사사로운 수준에 그치는지 묻고 싶었고, 사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현 상황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있었던 존재들>은 과학수사과 현장 감식 업무를 담당했던 경찰관으로서 만났던 '있었으나 사라진 존재들'이 남긴 죽음의 현장과 그들이 숫자로 처리되는 현실에 관한 세세하고도 처절한 기록이 담긴 칼럼집이다.

2022년 자살로 처리된 변사자의 수는 12,727명, 하루에 34.8명꼴로 자살을 한다고 한다. 과학수사과에서 현장 감식 업무를 담당하며 수백 명의 변사자를 본 작가는, 투신자살, 목맴사, 고독사 등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을 보며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과학수사요원으로서 느낀 감정을 가감 없이 이 책에 기록했다.

수없이 많은 변사자를 목격했던 경찰관이지만 사건을 복기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용기를 낸 이유는, '하루에 34.8명이 자살로 죽는 나라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지막을 나의 마지막처럼 숭고하게 여기고, 그들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하는 경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불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소외된 죽음들이 줄어들길 바라는 소망을 담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경찰관으로 살아가는 고충과 외로움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일이 잘 풀려 제법 어린 나이에 밥그릇을 쟁취했지만 경찰관을 직업으로 선택한 과거를 가장 후회하는 순간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을 때다'(69쪽)라는 고백에서 그가 짊어지고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무게가 느껴졌다.

경찰관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사람들을 바라볼 때 범죄의 흔적은 없는지 살피게 되는 상황이, 인간 원도의 삶에서 온기를 빼앗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관을 신뢰하지도 않고 신뢰할 수도 없는 사회. 경찰관이 해줄 수 있는 일이 드물지만 해달라는 일이 넘쳐나는 사회.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일감을 몰아주고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119쪽)'는 현직 경찰관들을 얼마나 어렵고 외롭고 괴롭게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신고를 받고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민 불안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경찰차 한 대 세울 곳을 허락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반면에 '저를 발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한때는 사람이었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자신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어떤 트라우마도 겪지 않길 진심을 바란다는 말을 남긴 어떤 변사자의 편지는 먹먹함을 차오르게 한다.

원도의 <있었던 존재들>은, 세상의 얼어붙은 마음들을 녹일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세상을 바라는 기도가 담긴 책이면서, 희망이 없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희망과 변화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긴 책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숭고하게 여기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지은 누군가의 마지막 표정을 향해 기도를 보내면서,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경찰관이 한 명쯤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본다. 또한 '세상 밖으로 밀려난 기분을 느끼는 모든 경찰관들의 호흡이 조금은 편안해지기를 바란다'라고 동료들을 향해 보내는 위로의 메시지에서는 묵직한 진심이 읽혀 울음을 차오르게 한다.

<있지만 없는 아이들>의 저자 은유 작가가 이 책의 추천사에 쓴 '원도의 글을 읽는 것은 세상의 접힌 한 귀퉁이를 펼쳐보는 일이다. 긴 사직서이자 짧은 유서를 썼다 지우는 이들에게 하루를 선물하는 책이다'라고 표현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라고 했던 어떤 작가의 말이 겹쳐진다. 어쩌면 용기 있는 작가 한 명의 글이 세상 곳곳에 다양한 종류의 연대를 만들어내, 세상의 온도를 조금씩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있었던 존재들 - 경찰관 원도가 현장에서 수집한 생애 사전

원도 (지은이),
세미콜론, 2024


#있었던존재들 #원도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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