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한국화가.
최방식
오리무중 그 한가운데서 억지춘양
우여곡절 끝에 그는 여주에 정착했다. 그곳 자연 속 삶은 그에게 성찰의 기회를 줬다. 끝없는 뒤 돌아보기, 그 끝에 찾은 건 궁극의 그 무엇이 아니었다. 자신을 깨닫고 자신이 하려는 미술의 본질을 찾아가는 여정이 곧 미술이라는 깨달음.
그 화풍을 궁금해하자 손사래를 치면서도 말을 잇는다. 머릿속에 떠올려도 그려지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창의력이 발동해 시작하면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 그게 쌓여 흐름이 된단다. 대나무, 숲 등 대상의 단순 묘사를 넘어 은유적 표현을 찾는다고 할까.
"시를 읽게 됐어요. 문인화도 찾아보고. 시적 감성, 그 함축적 은유를 알아가고 있죠. 내 그림을 하나의 시로 여겨 메모해 보기도 하고요. 답은 안 나오고 어렵기만 하네요. 구도와 색감 씨름을 하기도 해요. 감성을 깨우는 시를 더 많이 읽으려고요."
경교명승첩이란 그림 모음이 있다. 화가 겸재(정선)와 시인 사천(이병헌)이 주거니 받거니 시에 그림, 그림에 시를 붙인 것이다. '시화상간첩(詩畵相看帖)'이라 불리는 까닭이다. 겸재가 '목멱조돈'(남산 해돋이)를 그리니 사천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시를 붙였다. 남종화(문인화) 선조 왕유(당나라 시인 겸 화가)도 그림과 시를 같이 했는데, 시인 소동파(북송)는 '시 속 그림 있고, 그림 속 시 있다'고 했다. 김 작가의 시상(詩想)을 기대한다.
김 작가의 미술은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로 거슬러 오른다. 농촌(전북 김제)에서 자랐는데 학교 마치고 귀갓길 논둑 수로에 걸터앉아 풀밭이나 맨땅에 무언가를 그리는 기억에서 시작된다. 재능은 모르겠고, 그림이 재미있었다고 했다.
"둘째 형이 50색깔 크레파스를 사다 준 적이 있어요. 그 형이 언젠가 양철통을 가져오라더니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서울 있을 때 극장 간판 그림을 그렸다면서요. 형 방에는 자신이 그렸다는 그림이 걸려 있었죠. 푸시킨의 시 한 구절(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화내지 말라)도 쓰여 있었고요."
고교에서는 미술부 활동을 했다. 그 애들 따라 시내 화실에도 가봤다. 거기서 미술대학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원장이 미대 출신인데, 나더러 미대에 가보라고 권했다. 무턱대고 그 원장이 다녔다는 미대에 지원해봤는데, 떨어졌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대학은 언감생심이었죠. 갈 생각도 안 했고요. 근데, 미술부 10명 중 9명이 미대에 진학하고 나만 남은 거예요. 7년여 농사를 짓다 용기를 냈죠. 모심는 날인데, 아버지에게 1백만원만 주면 성공해 돌아오겠다고 했죠."
그는 아버지가 내미는 1백만원을 받아들고 그해 6월 상경했다. 홍대 앞 독서실(돈 없어 총무 알바)에 기거하며 화실(청소 알바)에서 6개월간 그의 인생 가장 혹독한 공부를 했다. 그 해 그 대학 미술대 동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림 속 시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