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용사인 아버지가 명예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전쟁과 이산의 아픔을 잊지 말라고 늘 강조한다.
이혁진
나는 실향민 2세라, 전쟁이 얼마나 몸서리쳐지는지 안다. 전쟁은 인간의 모든 걸 파괴한다. 가족의 해체와 이산 등 실향민을 양산하고 이들은 고통의 삶을 감내해야만 한다. 아버지 같은 실향민들은,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무 도움 없이 홀로 살아내야만 했다(관련 기사: '희망고문' 된 이산가족 상봉, 실향민에겐 시간이 없다
https://omn.kr/24pp6 ).
경제적인 빈곤도 서러운데, 타향에서의 외로움과 설움, 차별과 박대는 상상을 초월했단다. 전쟁 이후 당시만 해도 '3.8 따라지'라는 비하하는 취지의 말이 있어, 가족도 집도 고향도 없는 이북 출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특히 월남한 개성과 개풍인들은, 이쪽 저쪽에서 '3.8선 경계선 출신'이라는 딱지가 붙어 더 냉대와 멸시를 심하게 당해야 했다. 이른바 분단 갈등의 최대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다.
원래는 남한 땅이었던 곳이 북한 땅으로
여기서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다. 아버지 고향인 개풍과 인접한 개성이 북한땅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해방 이후 남북이 3.8선으로 분단됐을 때 개성과 개풍은 남한땅이었다. 휴전협정으로 3.8선과 휴전선이 달라지면서 개성과 개풍은 북한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당시 실향민들은 하루하루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급했다. 악조건 속에도 실향민들은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남한 사회에 차차 적응해 나갔다. 주변 실향민들 얘길 들으면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이 없단다. 통일이 되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아버지는 고향에 남겨둔 부모와 형제들의 생사 소식을 듣기 위해 세 차례나 중국으로 건너가 브로커를 수십 번 접촉하기도 했다. 끝내 기다리던 답변이 없어 실망했지만, 아버지는 가족을 찾으려는 희망을 평생 놓지 않았다.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 고향 가족을 혹시나 만날 수 있을까 싶어 사연을 접수하고 현수막과 전단을 여의도 광장에 내걸었다. 나는 몰랐다, 아버지 같은 실향민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거기서 분단과 전쟁의 그늘을 직접 목격했다. 이산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