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남주 시인
해남군
현아 선배께
지금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직업 명사로, 혹은 이렇다 저렇다 몇 동사, 형용사로 단정하기만은 쉽지는 않겠지요. 그게 곧, 제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그렇다고 못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 모습을 스스로 생각하면, 이런 제 모습을 견인하고 구성하는 데에, 초등학생일 때의 한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은연중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선배의 경험처럼요.
목소리가 큰 어린이였어요. 학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았지요. 학급 회의를 능숙하게 진행하기도 하였고,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고, 동아리를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당당...하기 짝이 없던 이 어린이가 머리 굵은 5학년이 되었던 때, 담임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결혼식은 부산의 모 대학교 근처 작은 성당에서 있었는데요. 그 성당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거리는 찢어진 깃발들, 깨진 유리병이 나뒹구는 난장판이었고요. 머리에 띠를 두른 대학생들을 쫓고 해산시키려는 경찰들, 그럼에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던 대학생 누나, 형들... 최루탄 연기란 것을 처음 맡아 보았습니다.
아수라장을 뚫고 겨우 도착한 성당에서 한 여학생과 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선생님 결혼의 화동이 되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생님께서 우릴 보는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어쩐지 모를 미안함과 슬픔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알려주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왜요?"라는 질문을 반가이 여기던 선생님이셨어요. 교과서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서 스스로 발표할 것을 권장하던 선생님이셨습니다. 1992년 그해, 꽃다지가 <수선전도>라는 앨범명으로 1집을 냈었는데요. 그 앨범에는 김남주의 시를 노래로 만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도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노래 역시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12살의 어린이들은 가사 속 동지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들에 담긴 풍경을 상상하긴 어려웠을 텐데 이 선생님은 왜 그런 노래를 들려주신 걸까요.
목소리가 크고,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기 짝이 없던 한 어린이에게, 한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창섭아, 너는 꼭,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큰 목소리와 당당함을 나쁜 방향으로 쓰지 말라는 당부였겠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한 선생님이, 자신이 못 이룬 꿈을 한 소년에게 전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해요. 그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됩니다. 그 소년은 과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보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소년은 그날 이후, 그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정에서, 어떤 거리에서, 어떤 광장에서, 그리고 그 노래의 가사를 쓴 시인의 30주기 추모 문학제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한 명이 한 명이 그때의 그 선생님 같다 느끼면서, 수십, 수백, 수천의 김남주 같다... 느끼면서...
우리는 김남주의 30주기를 맞아 행사를 진행하며, 글 연재를 이어오며, 계속해서 김남주를 복원했습니다. 그가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무엇부터 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말을 했을까, 어떤 시를 썼을까. 저 역시 궁금한데요.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김남주를 꼭 오래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그를 계속 새 시대에 복원해야 하는 것일까. 대신 다른 기억할 이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선배가 그 선생님을 기억하듯,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한 선생님을 기억하듯, 각자에게 각자의 기억이 많아졌으면 해요. 그리고 각자 또 누군가에게 기억을 남겨주는 이름들이 되었으면 해요. 자신의 후회와 아쉬움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며, 삶의 방향을 조율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아무개야, 너는 꼭,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아무개가 김남주는 모르더라도 권창섭이란 이름을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때 그 선생님, 김혜선이란 이름이 제게 당부한 "세상을 '나름'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남주라는 마음이 김혜선으로, 김혜선이란 마음이 권창섭으로, 그리고 권창섭이란 마음이 아무개에게 이어진다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지가 길었네요. 유현아라는 이름은 앞으로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하나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 연재를 마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