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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공장 옥상에서 300일... "이분들 이름만 보면 울컥"

[2024, 지금 김남주] 권창섭-유현아 시인의 이메일 대담... 노동자 박정혜와 소현숙

등록 2024.11.07 11:19수정 2024.11.07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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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딱 30년이 되었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라고 노래한 시인의 바람대로, 우리는 손을 잡고 함께 걸어 온 것일까.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김남주 정신이 필요하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지금 여기에서 김남주가 다시 살아 서 있는 모습을 그려 본다. 24인의 문학인들과 활동가들이 2024년의 한국 사회를 짚어 보며,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자 한다. [편집자말]
 9월 29일 김남주생각에서 열린 청년문학제 단체사진
9월 29일 김남주생각에서 열린 청년문학제 단체사진한승훈

현아 선배께

전 어쩌면 "김, 남, 주"라는 세 글자 이름의 무게를 너무도 가벼이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일을 맡기면 평균 이상은 언제나 해내니까, 특히 행사 진행은 부족함 없이 잘 수행하니까, 그러니까 내게 사회를 맡아달라는 제안이리라 생각하고, 전 아무런 부담 없이 수락하였습니다. 적당히 출연진을 소개하고, 적당히 출연진이 교체되는 시간 사이를 채우면 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늘 하던 대로 적당히.


김남주 30주기 추모 청년문학제가 열린 9월 29일 해남의 햇볕은 너무도 강렬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햇볕에 앉아 무대를 지켜보던 한 선생님의 팔뚝이 화상을 입은 듯 붉게 달아오를 정도였죠. 그날 저는 마이크를 잡은 채, 행사가 진행될수록 자꾸만 후회가 깊어졌습니다. 조금 더 무겁게, 조금 더 진하게 이 자리를 준비했어야 했다, 가볍고 옅고 설 자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행사는 물론 잘 치러졌습니다. 하늘은 눈부셨고, 대숲은 고요했습니다. 음악은 아름다웠고 낭독들은 강렬했지요. 사람들은 종종 웃었고, 그리고 자주 눈물을 훔쳤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함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을 합창하였고, 노래가 끝난 후, 각자 가야 할 길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김남주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 자리가 이렇게나 중한 자리인 줄을, 이 특별 연재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중에도, 문학제 사회를 보기 위해 해남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압니다. 그동안 24인이 김남주를 생각하며 쓴 글들을 읽으며, 그날 눈부신 햇살 아래 김남주를 기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제가 맡은 이 일들의 무게를 새삼 다시 깨닫습니다. 선배께 묻습니다. 선배는 어떠셨나요? 김남주 30주기를 맞아 이런저런 일을 맡으신 선배께는 "김남주"란 이름이 어떤 의미인지를, "김남주"를 기리는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김남주 시인
김남주 시인김남주기념사업회

창섭에게

어느 날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은 카세트테이프에 한 노래를 담아왔어요. 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를 칠판에 적어주셨지요. 열여덟 살이 처음 들어본 김남주 시인의 노래는 비장하고 뭔지 모르지만 무서웠어요. '죽창가'로 제목을 단 노래는 김남주 시인의 시 '노래'였습니다.


녹두꽃이 되자고, 파랑새가 되자고, 들불이 되자고 하더니 마침내는 반란이 되고, 죽창이 되자고(죽창은 무려 두 번이나 언급) 하니 비참하고 어렸던 난 이 노래에 꽂혀 날마다 흥얼거리고 다녔나 봅니다. 시는 내게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아름답고 고귀하고 청명한 하늘에 다정한 한 쌍의 구름이 일렁이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반란'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내뱉는 시라니, 그것도 노래가 된 시라니. 김남주 시인은 그렇게 제게 시인이기보다는 어떤 생각의 궁핍에서 벗어나라고 말 거는 유령 같다고 할까.

김남주 시인이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함께 가자는 말은 이제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는 헛헛한 문장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김남주 시인의 30주기는 선배들이 기억하는 김남주 시인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끝냈을지 몰라요. 그렇다면 나는 말이죠. 김남주 시인이 그토록 바랐던 해방의 날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을까를 생각해 봤어요. 마흔아홉 살에 김남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스물아홉 살에 김남주의 시는 왜 그토록 질문이 가득한 시를 썼을까요. 그 마음이 2024년의 스물아홉 살에게, 마흔아홉 살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시인이 묻고자 했던 질문을 함께 해보고자 했습니다. 때론 촌스럽지만 그 시절의 이야기로, 화가 많이 나 있는 지금의 이야기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김남주'가 있었다. 노동자를, 농민을,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시민의 이야기를, 김남주를 기억하지 못해도 김남주의 이야기를 그들의 목소리로 듣고 싶었습니다. 사라진 김남주가 아닌 지극히 보통의 목소리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당신, 김남주 시인을 아시나요? 몰라도 되어요. 김남주가 꿈꿨던 세상을 당신도 꿈꾸고 있잖아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요. 그럼에도 나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도 들려주길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그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창섭은 어떤가요? 조금 지나면 '김남주 시인'이 있었다는 기억이 사라질 수도 있는 시절이 올 텐데요. '김남주 시인'의 마음이 어떤 일상으로 다가왔으면 좋을까요? 당신은 지금 괜찮은가요?

 고 김남주 시인
고 김남주 시인해남군

현아 선배께

지금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어떤 직업 명사로, 혹은 이렇다 저렇다 몇 동사, 형용사로 단정하기만은 쉽지는 않겠지요. 그게 곧, 제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그렇다고 못 살아가고 있다는 뜻도 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제 모습을 스스로 생각하면, 이런 제 모습을 견인하고 구성하는 데에, 초등학생일 때의 한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은연중에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어요. 선배의 경험처럼요.

목소리가 큰 어린이였어요. 학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는 데에 머뭇거리지 않았지요. 학급 회의를 능숙하게 진행하기도 하였고, 신문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고, 동아리를 만들어 이런저런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당당...하기 짝이 없던 이 어린이가 머리 굵은 5학년이 되었던 때, 담임 선생님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결혼식은 부산의 모 대학교 근처 작은 성당에서 있었는데요. 그 성당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제게 충격이었습니다. 거리는 찢어진 깃발들, 깨진 유리병이 나뒹구는 난장판이었고요. 머리에 띠를 두른 대학생들을 쫓고 해산시키려는 경찰들, 그럼에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던 대학생 누나, 형들... 최루탄 연기란 것을 처음 맡아 보았습니다.

아수라장을 뚫고 겨우 도착한 성당에서 한 여학생과 저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된 채, 선생님 결혼의 화동이 되었습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선생님께서 우릴 보는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어쩐지 모를 미안함과 슬픔이 섞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아침이슬'이란 노래를 알려주시던 선생님이었습니다. 학생들의 "왜요?"라는 질문을 반가이 여기던 선생님이셨어요. 교과서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조사해서 스스로 발표할 것을 권장하던 선생님이셨습니다. 1992년 그해, 꽃다지가 <수선전도>라는 앨범명으로 1집을 냈었는데요. 그 앨범에는 김남주의 시를 노래로 만든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도 수록되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노래 역시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12살의 어린이들은 가사 속 동지니 투쟁이니 하는 단어들에 담긴 풍경을 상상하긴 어려웠을 텐데 이 선생님은 왜 그런 노래를 들려주신 걸까요.

목소리가 크고,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기 짝이 없던 한 어린이에게, 한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창섭아, 너는 꼭,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큰 목소리와 당당함을 나쁜 방향으로 쓰지 말라는 당부였겠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한 선생님이, 자신이 못 이룬 꿈을 한 소년에게 전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해요. 그 기억을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 이렇게 다시 꺼내게 됩니다. 그 소년은 과연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긍정적인 답변보다는 부정적인 답변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소년은 그날 이후, 그 노래를 자주 부르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정에서, 어떤 거리에서, 어떤 광장에서, 그리고 그 노래의 가사를 쓴 시인의 30주기 추모 문학제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한 명이 한 명이 그때의 그 선생님 같다 느끼면서, 수십, 수백, 수천의 김남주 같다... 느끼면서...

우리는 김남주의 30주기를 맞아 행사를 진행하며, 글 연재를 이어오며, 계속해서 김남주를 복원했습니다. 그가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무엇부터 했을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떤 말을 했을까, 어떤 시를 썼을까. 저 역시 궁금한데요.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김남주를 꼭 오래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 그를 계속 새 시대에 복원해야 하는 것일까. 대신 다른 기억할 이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선배가 그 선생님을 기억하듯,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한 선생님을 기억하듯, 각자에게 각자의 기억이 많아졌으면 해요. 그리고 각자 또 누군가에게 기억을 남겨주는 이름들이 되었으면 해요. 자신의 후회와 아쉬움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며, 삶의 방향을 조율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아무개야, 너는 꼭,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그리고 아무개가 김남주는 모르더라도 권창섭이란 이름을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때 그 선생님, 김혜선이란 이름이 제게 당부한 "세상을 '나름' 바꾸는 사람"이 되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김남주라는 마음이 김혜선으로, 김혜선이란 마음이 권창섭으로, 그리고 권창섭이란 마음이 아무개에게 이어진다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편지가 길었네요. 유현아라는 이름은 앞으로 어떤 의미가 되었으면 하나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 연재를 마치고자 합니다.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김남주 시인(제일 왼쪽)
1985년 광주교도소에서 김남주 시인(제일 왼쪽)김남주기념사업회

기억하는 이름, 창섭에게

"김남주를 꼭 오래 기억해야 하는 것" 대신 "다른 기억할 이름들이 많아졌으면"하는 창섭의 바람을 읽고 '나'란 인간을 되돌아봤네요. 나의 기억은 여전히 굳어있기도 합니다. 어떤 기억은 흘러가게 놔두는 것도 그런 이유이기도 하겠네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래를 불러주는 이들, 곁에 있어 주는 이들이 보이죠. 여전히 세상은 아수라장이고 전쟁으로 사람들이 사라지고, 버티는 것이 한계에 이르러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고, 억울하고 분노한 목소리들이 지천으로 깔렸습니다.

김남주 시인은 <노동과 그날그날>이라는 시 끝에 각주를 달았어요.

<노동과 그날그날>은 내 평생 써야 할 연작시이다.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내 시도 끝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동이란 자연에 노동력을 가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어떤 생산물을 생산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대한 투쟁도 나에게 있어서는 노동이다. 우리 시대는 이 투쟁으로서의 노동이 더 절실하고 긴박하게 요구되고 있다.

30년 전에 쓴 시를 읽는데, 지금 읽는데, 시가 내 눈앞에서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경북 구미에 있는 한국옵티칼 공장 옥상에 올라 농성 중인 여성노동자 박정혜·소현숙의 모습
경북 구미에 있는 한국옵티칼 공장 옥상에 올라 농성 중인 여성노동자 박정혜·소현숙의 모습노순택

두 사람의 이름을 최근에 알았어요. 불탄 공장 옥상에서 300일을 버티고 있습니다. 박정혜와 소현숙은 노동자입니다. 나는 300일이라는 숫자를 헤아려보았습니다. 봄의 향기를 여름의 열기를 가을의 온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두 개의 이름을, 두 사람을 말이지요. 공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그 꿈이 꿈이 아니기를 온몸에 새기고 있는 여성 노동자예요. 난 말이죠, 무척이나 부정적이고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있어요.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하죠. 너무나도 아픔의 현장들이 많아 나의 아픔에 집중하기도 해요.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을 드러내며 방어벽을 치죠.

창섭, 창섭의 편지를 받고 박정혜와 소현숙이라는 이름을 나직이 불러봤어요. 가닿지 않은 마음에 대해서도 기억했어요. 구미가 어디일까요? 한국옵티칼하이테크는 뭘 만드는 공장일까요? 공장이 불에 탔다고 노동자를 버리고 간 광경을 떠올려 봤어요. 30년 전에 죽은 '시인'이라는 사람을 기억해 봅니다. 난 김남주 시인의 시를 흥얼거렸던 열여덟 살도 아니고 넉넉히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도 아니지만, 바로 이때 김남주 시인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네요.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올 이름들을 기억하면서요.

김남주 시인 30주기의 주제는 "2024, 지금 김남주"였지요. 24명의 작가, 활동가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김남주를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었어요. 24명의 연결된 이름과 그 이름들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저 일하는 사람으로 곁의 친구들과 '투쟁'이라는 말은 못 해도 '함께'라는 말은 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가끔은 어떤 이름을 듣고(지금은 박정혜와 소현숙이) 울컥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싸르르한 느낌을 가진 이름으로 살아볼게요. 연재를 처음 하자고 했을 때 흔쾌히 함께해 주어서 고마워요. 권창섭이라는 시인의 우정을 기억할게요. 스물네 분의 이름과 이야기를 기억할게요. 그날이 오기를 별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함께 볼 수 있기를 천천히 기다려볼게요.

그날이 오면/훨씬 잘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훨씬 못사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별을 보는 사람들의 눈도 같아질 것이다 - <노동과 그날그날> 부분
덧붙이는 글 공동주최 : 김남주기념사업회·한국작가회의·익천문화재단 길동무
후원 : 더숲문화재단
#김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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