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미국사는이야기>1- 미연이와 주영이에게

-'미국 사는 이야기'를 시작하며

등록 2000.02.25 11:53수정 2000.02.26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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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과 Y2K 버그 얘기를 지겹게 듣는 터라 가끔씩 보는 징그럽게 큰 미국 바퀴벌레가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때였다. 무릎보다 가느다란 허벅지를 드러낸 수단의 해골들과 코소보에서 갓난쟁이들을 안고 온 여자들의 사진으로 연일 가슴이 무너지고 있던 바로 그 무렵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음- 성희 맞니?
나 미연이야.
미국 건너온 지 10년 동안 한번 생각하지도 않았고 생각할 이유도 별로 없었던 대학 친구였다.
어찌어찌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된 미연이가 10년 동안 소식없이 지내던 옛날 친구, 특별히 가까웠다고도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어정쩡한 관계였던 내게 갑작스런 국제전화를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기는 어떤지 알아보고 싶어서' 였다.

사는 것이 어떤지.
사는 것이 어떻다니?
사는 것은 어디든지 다 마찬가지지.
그래도 거기서 사는 것은 어떤지 그걸 궁금해 했다.
미연이는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같은 대학에서 만나 결혼한 남편은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얘, 남편 직장 확실하고 시부모님께서 이리저리 도와주시고 하는 데 왜 굳이 여길 오려고 해?
웬만하면 그냥 거기서 살지.
웬만하면 거기서 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너 고생 많이 했나 보구나?
고생안한 사람들은 좋다고 다들 오라고 하는데.
그러니?
순간 10년의 내 생활을 모두 들켜 버린 것 같아 공연히 얼굴에서 열이났다.
그냥. 좀 바꿔 보고 싶어서.

시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차리면서 이 반찬을 이쪽에 놓을까요. 저쪽에 놓을까요.
후식용 과일은 이 쟁반에 담을까요. 저 쟁반에 담을까요. 그런거 신경쓰며 살고 싶지 않아서.

세상에. 그게 이민을 생각하는 이유였다.
물론 가장 흔한 핑계이자 현실인 애들 교육 얘기도 꺼내긴 했다.


어머! 아무일도 안 일어났네!
1999년 12월 31일 밤 12시.
남편과 TV를 보고 있었다.
시 정부의 Y2K 비상 근무 상황실과 아틀란타 공항을 오가며 단 한건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앵커의 뉴스를 전해 들으며 웬지 허탈했던 밤을 보내고 몇일 안가서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성희니?
나 주영이.
얼마전 미연이 전화에 비하면 그리 놀라운 전화는 아니었다.
항상 붙어다니던 고등학교 친구였고 이민 온 후로도 가끔씩 전화와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까.


얘, 너 요즘은 어떻게 사니?
뭐 애들 키우고 남편은 직장에 다니고 그러겠지? 너 아직도 일 하지? 자리는 좀 잡아가니?
얘, 거기 어떻게 사는지 좀 자세히 얘기해줄래?
한꺼번에 묻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이민가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그런 것 말이야.
너, 이민 생각하니?
응.

몇 년간 남편과 함께 프랑스 유학생활을 보낸 터라 외국생활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친구였다.
둘 다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친구는 석사, 남편은 박사학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간 지가 벌써 5년은 된 것 같은데 남편이 아직도 시간강사를 못 면해 장거리 운전을 해가며 이 학교 저 학교 열심히 뛰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비전이 안 보인다.
미국으로 가고 싶은데 갈 수 있는 방법이 우리는 전혀 없잖니.
그래서 캐나다에 전문직 이민 신청 해 놓았어.
될지 안될지 무작정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일단 수속은 해 보려구.
캐나다 갔다가 미국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구.

미연아, 그리고 주영아,
이제야 너희들이 듣기 원하던 미국 사는 이야기를 들려 줄 기회가 온 것 같애.
그래 얘기 해 줄께. 자세히 말이야.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아무렴. 오더라도 여기가 어떤지는 알고 와야지.
한번 건너오면 쉽게 다시 갈 수도 없는 땅인데.

여기 아틀란타는 날씨하나는 끝내 준다.
쪽빛이라고 하지? 한국 가을 하늘을 두고. 지금도 한국 하늘의 가을은 그렇게 높고 푸르니?
여기 하늘은 그렇게 푸른 날이 많아. 가을뿐 아니라 사시사철.
그 푸른 하늘 속에 빠져들면 누구라도 저절로 시인이 되지.

그런데 문제는 예기치 않은 '토네이도' 가 언제 불어올지 모른다는 거야.
'토네이도'.
한국사람 귀에는 생경한 말. 토네이도.
그 푸른 하늘과 무서운 토네이도 속에서 미국 사는 이야기를 풀어놔 볼께.
너희들 이민 결정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내일 '미국사는 이야기' 는 <도서관에 가면 책을 한 박스 가지고 나온다> 야.
그럼 내일 만나서 또 얘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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